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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뒤탈 없어야 할 ‘잊혀질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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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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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충치 하나둘은 다 있듯 부끄러운 과거는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예전엔 망각 속에 묻으면 됐지만 이젠 시대가 변했다. 인터넷 검색 한 방이면 치욕스러운 과거가 죄다 뜨는 세상이다.

마리오 코스테자라는 스페인 변호사가 그 꼴을 당했다. 1998년 빚에 몰린 그는 집을 경매 처분당할 위기에 몰린다. 더 불운했던 건 이런 사실이 지역 신문에 실렸다는 거다. 그는 얼마 후 빚을 갚아 집은 건졌지만 차압당했다는 기사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주택 압류 기사는 계속 떴다. 참다 못한 그는 신문사와 구글을 상대로 기사를 삭제해 달라는 소송을 내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ECJ)에서 이긴다.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잊혀질 권리’가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 판결 뒤 구글에는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지워 달라는 요청이 10개월간 21만여 건이나 쏟아졌다. 잊혀지려는 이들이 이토록 많았던 거다.

잊혀질 권리는 최근에야 도입됐지만 사생활 중시의 전통이 강한 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뿌리 내리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잊혀질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글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10만 유로(약 1억3000만원)의 벌금을 맞았다. 최근에는 ‘오블리비언’이란 소프트웨어까지 개발돼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자료들을 순식간에 지워준다.

하지만 논란도 적지 않다. 잊혀질 권리만 챙기면 공익 차원의 알권리가 질식한다. 2014년 영국의 한 성형외과 의사가 자신의 수술 결과에 대한 글들을 지워 달라고 요구해 관철시킨 적이 있다. 잊혀질 권리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빗발쳐 없던 일이 됐다. 삭제된 게 의사의 형편없는 수술 실력을 고발한 글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보를 없애는 건 올바른 의료 선택권을 막는 일이 된다.

같은 해 크로아티아 출신의 데얀 라지치란 피아니스트가 비슷한 일을 꾸미려다 실패했다. 그는 자신의 연주에 대한 악평이 워싱턴포스트에 실리자 “악의에 찬 중상모략의 글”이라며 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이 역시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려는 잘못된 태도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2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온라인상의 잊혀질 권리에 대한 가이드라인 초안을 내놨다. 일단 자신의 글만 차단할 수 있게 하고 더 들여다볼 모양이다. 다른 어디보다 사이버 공간이 활발한 나라가 한국이다. 새롭게 도입되는 잊혀질 권리인 만큼 요모조모 따져가며 정해야 뒤탈이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