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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스 오브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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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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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우연인가 필연인가. ‘이데스 오브 마치’(Ides of March), 3월 15일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날 줄리어스 시저가 살해당하면서 흉사·배반이란 의미가 더해졌다. 한국엔 ‘킹메이커’란 제목으로 소개된 2011년 조지 클루니 영화의 원제이기도 하다. 음모와 복수가 뒤엉킨 정치 드라마였다.

영국에서 이달 이 단어가 빈번하게 거론됐다. ‘이데스’의 영어 발음인 ‘아이디스’와 유사한 이니셜(IDS)의 정치인 행보 때문이다. 이언 덩컨스미스 전 고용연금장관이다.

한때 보수당수를 지냈던 그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 보낸 격정의 사퇴서에서 “우리(보수당)에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복지 혜택을 깎고 있다”고 비난했다. ‘포용적 보수’를 내세웠던 캐머런에겐 치명상이었다.

보수당은 이후 내전 상태다. 30년 전 한 장관의 사퇴에서 비롯된 마거릿 대처 총리의 실각을 떠올리는 이도 많다. 영국엔 ‘집단적 책임’이란 불문헌법적 개념이 있다. 내각의 일원이라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안도 그런 경우였다. IDS의 행동을 두고 ‘IDS 오브 마치’란 비유가 등장하는 까닭이다. 우연이 때론 필연처럼 보인다.

IDS는 진정 보수당을 걱정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정치적 야심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그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어서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당권 도전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는 의도란 것이다.

IDS의 승부수는 일단 통했다. 유럽연합(EU) 잔류란 결과가 나오면 캐머런 총리가 총리직을 유지할 것이란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떤 결과든 당수 선거가 있을 것이란 예상이다.

캐머런 총리로선 불쾌한 게 당연했다. 그와 가까운 인사들은 IDS를 향해 “안에서 합의해 놓고 밖에서 딴소리했다”고 공격했다.

권력자는 현실의 경쟁자든 상상의 경쟁자든 없애버리려 한다. 그에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충성이다. 자기편을 우대하고 반대파를 제거한다. 민주주의 지도자라고 그 심리가 다르진 않다. 차이가 있다면 진짜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죽일 수 없다는 것, 때론 죽이는 게 불리하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설령 ‘죽여도’ 세련되게 한다는 것이다.

무딘 칼바람의 한국 정치를 보며 과연 같은 2016년을 살고 있나 싶다. 민주주의 역사와 경험의 차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잘 되진 않는다. 캐머런 총리는 적어도 공개석상에선 “IDS의 그간 노고에 감사하다”고 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