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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정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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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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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산타 할아버지는 누가 나쁜 애인지 착한 애인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설레면서도 불안한 연말의 첫 경험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 뒤로 기말고사와 입시가 있었고, 직업인이 된 뒤로는 고과 평가가 따라다닌다. 인사이동의 철이기도 하다. 축하 인사보다 위로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자리는 제한적이고 그곳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리 수보다 훨씬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서울 광화문의 ‘사랑의 온도탑’은 아직 눈금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매년 요맘때 탑의 수은주가 빨리 올라가지 않는다는 게 사회적 이슈가 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난 11월 말에 세워놓은 이 탑의 수은주는 모금 목표액(3430억원)에서 1%가 찰 때마다 1도가 오른다. 22일 오후 현재 탑의 온도는 46도다. 지난해 같은 때에 비해서는 약간 높은 온도지만 모금회의 기대보다 상승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 이 조형물은 왜 시내 복판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많은 이가 참여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일까, 아니면 참여를 안 하고 있다며 경고하려는 것일까.

 대학교수들이 뽑는 한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올해는 ‘세상이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가 제시됐다. 지난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속임)였다. 위정자의 실덕을 꼬집는 독설을 드러내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교수단체에서 운영하는 신문이 올해는 1만4000여 명의 교수에게 설문조사를 시도했고 886명의 응답을 받아 이를 뽑았다. 그래도 전체 교수들의 뜻이 담긴 것으로 얘기된다.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고, 사슴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는 데 교수들도 한몫하고 있다는 자성은 없다.

 한 구인·구직 업체가 최근 직장인들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8명꼴로 연말 우울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한 해 동안 성취한 것이 없다는 허무감,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의 소외감·박탈감, 새해에는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중압감 등을 호소했다. 직장인들이 이런데 취업에 실패한 청춘, 일자리에서 쫓겨난 중년은 어떨까. 우울증 환자의 30%가량이 연말에 증세가 나빠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보는 것 말고는 딱히 즐거운 일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도 모두 험한 세상을 잘 건너온 이들이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았다는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