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정담(政談)] “왜 직권상정 안 하나” 친정 여당서 구박하자 헬스장서 화 식힌 정의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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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저녁 만찬회동을 했던 정의화 국회의장(왼쪽)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18일 국회에서 열린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 영결식에서 만나 굳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원유철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는 무리를 지어 국회의장실로 쳐들어왔다. 그러곤 노동개혁 법안과 경제 살리기 법안을 직권상정이라도 해 달라고 졸랐다. 졸랐다고 하지만 여당 출신 의장이니 자기들 요구를 들어달라는 압박이었다. 야당이 반대하는 만큼 국회선진화법에 막혀 돌파구를 못 찾는 여당으로선 유일한 탈출구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었다.

여당 지도부, 의장실 찾아 압박
“이럴 시간에 야당 설득하라”
정 의장 소리 지르며 자리 박차
95년 황낙주 의장 직권상정 거부
YS “바깥 다니지도 말라” 호통

 하지만 정의화 의장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국회선진화법에 찬성해 놓고 (그 법에 반대했던)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이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야당을 설득하라.”

 남은 면담 일정이 있었지만 정 의장은 의장실을 나왔다. 그러곤 차에 올랐다. 정 의장이 탄 차는 걸어서 3분 거리의 국회 의원회관에 멈췄다. 한동안 사라졌던 정 의장은 나중에 체력단련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한다. 12월 16일에 있었던 일이다.

 국회의장의 수난기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압박에 정 의장 측은 숨이 막힌다고 했다. 18일 오전 국회에서 치러진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영결식에서 정 의장은 추모사에 이런 자신의 심경을 담았다. 그는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의장님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입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야당의 국회도 아닌 국민의 국회다’ ‘국회의원은 계파나 당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부터 생각하라’시던 의장님의 호통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남아 있는 저희들은 지금 이 시간 한없이 부끄럽습니다”고도 했다.

 정 의장이 이번 주 내내 국회로 출근하자마자 한 일은 기자들에게 ‘직권상정’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었다. 직권상정은 국회의장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특정 안건을 본회의에 곧바로 올려 표결에 부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19대 국회 들어 시행된 국회법 개정안,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은 전쟁이나 천재지변, 국가 비상사태, 여야의 합의 등으로 한정돼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물론이고 ‘친정’인 새누리당 지도부까지 나서서 정 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하고 있다. 정 의장이 16일 기자간담회까지 열고 “초법적 발상”이라며 거부 의사를 명확히 했지만 청와대는 “국회 정상화 책무가 의장에게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여당 지도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의장을 찾아가 ‘결단’을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 출신 국회의장의 ‘갈등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만섭 전 의장은 두 차례 재임기에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직권상정 때문에 척을 져야 했다. 1993년에는 ‘문민정부니 새해 예산안을 법정 시한(12월 2일) 내에 처리해야 한다’는 YS와 이 의장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당시 이 의장은 “야당 총재 시절 그렇게 날치기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며 YS에게 맞섰다. 지루한 시간을 보낸 끝에 예산안은 여야 합의로 처리됐다. 2000년에는 교섭단체 요건을 20석에서 15석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이 쟁점이었다. 공동정부의 한 축이었던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17석밖에 얻지 못하자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꾀를 냈다. 하지만 이 의장은 끝까지 버텼고, 민주당은 국회법 개정 대신 소속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키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었다.

 YS와 DJ 때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여당 출신 국회의장은 청와대의 하청업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95년 3월 YS는 통합선거법 직권상정 지시를 따르지 않은 황낙주 의장을 청와대로 불러 “바깥에 나돌아 다니지도 말라”고 호통을 쳤다. YS가 사석에선 ‘황 의장’이 아니라 ‘황 총무’(YS가 79년 신민당 총재이던 시절 황 의장은 원내총무를 지냄)라고 부른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땐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충돌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당시 김원기 의장 집무실에서 농성까지 하며 직권상정을 압박한 일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여당이라면 책임다수당의 자격이 없다”(전여옥 대변인)며 의장의 소신을 응원했다.

글=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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