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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카펫과 빨강의 마력,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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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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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경
화가

비가 오고 바람이 거세다. 레드카펫을 밟는 여배우들의 긴 옷자락이 연신 하이힐에 걸리고 다리의 속살을 드러낼 정도로 나부낀다. 지켜보는 내내 마음 졸이게 된다. 짓궂은 날씨에도 배우들은 밝은 미소로 손짓한다.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는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걷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붉은 양탄자 위를 걷는 배우들을 보면 꿈을 꾸는 것 같다. 어쩜 저렇게 매혹적일까 싶다. 그들은 행사장 런웨이보다 그 입구에 깔린 카펫을 지나갈 때 가장 아름답고 특별해 보인다. 40m가 채 안 되는 거리를 지나는 동안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레드카펫에 오르는 누구나 권위가 부여된 것처럼 보인다. 부럽고 질투가 난다. 사람을 달리 보이게 하는 그 마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트로이 전쟁을 다룬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 아가멤논이 개선하는 장면이 있다. 아가멤논을 맞이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붉은 천을 깔아 밟게 한다. 하지만 그는 빨강이 신의 색이기 때문에 그 위를 걸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이를 근거로 레드카펫의 기원은 트로이 전쟁이 있은 기원전 13세기까지 소급되곤 한다. 여기서 붉은 천으로 만든 길은 환영(歡迎)과 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 빨간 융단을 깔았다는 설이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대관식을 소상히 기록한 다비드나 앵그르 등의 역사화에는 레드카펫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화가에게 제작을 의뢰한 주문서 어디에도 바닥에 깐 붉은 천에 관한 항목은 없다. 레드카펫의 권위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폴레옹을 성급히 끌어들인 것 같다.

 레드카펫은 펼쳐진 그 위의 영역과 그 밖의 영역을 구별하고 동시에 이들 양 세계를 관련짓는 장치다. 특별히 대접받는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 위를 걷고 평범한 사람들이 밖에서 지켜본다. 특별한 사람은 보여줄 것이 있고 평범한 사람은 볼 것이 있다. 보여줄 것과 볼 것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둘은 서로를 향하는 관심에서 밀접하게 연관된다.

 간혹 행사장에 초대받지 못한 배우가 자신의 입신(立身)을 위해 그 입구에 깔린 카펫 위를 걷기도 한다. 그는 평범한 영역에 도저히 머물 수 없어 그와 같은 도전을 감행하기로 한 사람이다. 이처럼 레드카펫을 향한 열정과 밖을 향한 레드카펫 위의 관심은 서로 교차하고 영향을 끼친다. 이는 화면을 채우는 그림과 그것을 보는 관객 사이를 구별하고 연관 짓는 액자(frame)의 역할과 같다.

 카펫의 빨간 빛깔은 그 위를 걷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발밑에서 치오르는 빨강의 강렬한 파장이 코끝을 붉히고 이내 망막을 태울 기세로 강렬하게 걷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한다. 유아가 인식하는 최초의 색이 빨강이다. 스페인어로 콜로라도(colorado)는 색인 동시에 빨강을 뜻한다. 빨강은 명도가 낮음에도 채도가 가장 높은 색이다. 그래서 화가에게 가장 매혹적인 동시에 도전적인 색이다.

 온통 붉게 물든 카펫의 색에는 화가의 마음이 투사되고, 그것을 보는 이를 자극한다. 이는 화면 전체를 평평하게 칠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을 볼 때와 매우 유사하다. 또한 화가는 캔버스에 붉은색을 칠해 들어갈 때 현실을 망각하는 느낌이 든다. 넓은 면적에 붉게 칠이 된 평면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그리는 사람을 들뜨게 하고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깨닫게 한다. 온 하늘을 채우는 타는 저녁노을이나 온 산하를 덮는 단풍이 그렇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넓은 도심을 붉은 융단처럼 뒤덮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족쇄였던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 그때 거리 응원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레드카펫 위를 걷는 배우의 감흥을 누리며 열정을 토해내고 그것을 과시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은 20회째 펼쳐졌다. 성년의 연륜이다. 이제 그 감흥을 이해하는 수준 높은 관객과 당당한 배우들의 어울림은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있다. 거기에는 붉은 진달래꽃으로 덮은 길을 임이 “즈려밟고” 가게 내버려 두는 김소월 식의 속앓이는 더 이상 없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