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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이 우리 행복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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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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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논설위원

가설은 가설일 뿐 진리가 아니다.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

  가설은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어떤 이론 체계를 연역하기 위하여 설정한 가정”이다. 가설을 쉽게 풀이한다면 ‘뭔가를 설명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 같다. 하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가설을 세우며 살아간다. 이런 말도 가설이다. ‘저 사람은 종북이라 저래’. ‘국정교과서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유신시대 회귀를 위해서야’.

  가설을 말하지 않고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다. 대표적인 것 중에는 ‘노는 동물’ ‘뭔가를 만드는 동물’ ‘생각하는 동물’ ‘정치적 동물’ 등이 있으나 인간은 ‘가설을 세우는 동물(hypothesis-making animal)’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가설을 만들어내고 가설을 검증하는 작업을 계속해오지 않았다면 현대 문명도 없다. 현대 문명을 낳은 과학은 가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가설은 과학을 낳고 과학은 문명을 낳는다. 올해 노벨과학상을 받은 석학들은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는다는 것을 검증받은 사람들이다.

 가설은 진리로 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가설을 진리로 오판할 때 괴로워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는 사람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날 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일까. 여러 가설이 가능하다. (1) 속이 아파 화장실로 급히 가다가 나를 만났다. (2) 오늘 아침 크게 한판 부부 싸움을 했기에 그 여진이 얼굴에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3) 원래 표정이 그렇다. (4) 나를 싫어한다.

 마음이 여리고 또 착한 사람은 마지막 4번을 ‘진리’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4번 가설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우리네 사람들은 온갖 상념에 잠기기 시작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언제부터 나를 미워했을까’. ‘축의금을 너무 조금 넣어서 그런 걸까’. ‘술 한잔 같이 마시면 풀리려나’.

 이런 식으로 가설발(假設發) 걱정이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내게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가설을 아예 ‘거짓이 아니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악의 결과를 상상해보면 사실 별게 아니다. 걱정할 게 없다.

 ‘자기 계발의 메시아’라 불리는 데일 카네기(1888~1955)는 『걱정하기 그만두고 살기 시작하는 법(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1948, 우리말 제목은 『자기관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동으로 뭐든지 얻을 것만 남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또 다른 방법은 어떤 가설이 맞는지 결론 내리는 것을 멀리 미뤄버리는 것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에게 프랑스 혁명(1789~1799)의 공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아직 판단하기에 너무 이르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어떤가. 속단(速斷)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맨날 시험에서 최소 90점, 대부분 100점 받아오던 아이가 80점 받아오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망연자실한다. ‘저러다 명문대 못 가는데’. ‘명문대 못 가면 취업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가는데’. ‘그렇게 되면 불행하게 되는데’. 일련의 가설을 거치는 가운데 불행 얘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명문대를 나오면 행복하다는 것은 그저 가설에 불과하다.

 가설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설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수백, 수천의 가설 중에 하나는 진리로 판명날 수 있다. 가설은 가설일 뿐 진리가 아니지만, 가설은 또한 아직 거짓도 아니다.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1749~1827)가 “나는 신(神)이라는 가설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라플라스가 한 말이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통념으로 굳어져 버렸다). 라플라스가 동양인이었다면 ‘내겐 팔정도(八正道)·사성제(四聖諦)라는 가설이 필요 없다’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무신론자에게 종교는 거짓, 신앙인에겐 진리다. 중간자에겐 종교란 가설이다. 거짓과 가설과 진리를 잘 분별하는 데서 행복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