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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대립 넘자 … 세계사 속 한국사로 시야 넓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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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왼쪽 넷째)와 소속 의원들이 13일 서울 여의도역 앞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다 보수단체 회원들에게 거친 항의를 받았다. 문 대표 등은 충돌 우려로 30여 분 만에 중단했다. 왼쪽부터 강기정 의원, 이종걸 원내대표, 도종환 의원, 문 대표, 김영록 의원. [김성룡 기자]

달갑지 않은 월말 대금 청구서처럼 역사 교과서 논쟁이 꼬박꼬박 되돌아오는 이유는 뭘까. 지금까지의 논란은 정파적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권에 의해 증폭된 측면이 크다. 2004년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 논란, 2013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우편향 공방이 모두 그랬다.

역사 교과서, 이참에 제대로 <중> 근·현대사 더 줄이자
냉전시대 갇힌 학계 폐쇄성
진보성향 7080학번이 현대사 장악
팩트보다 민족주의 중시 분위기
사회·정치사 대신 운동사 쏟아내

 그런데 역사학계는 가만히 있는데 정치권과 일부 편향적 시민단체들이 혼란을 부추긴 것일까. 혼란의 빌미를 제공한 ‘부실 교과서’, 그런 교과서를 양산한 역사학계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학과 교수는 “우리 학계는 건전한 토론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본에 대해 정확하게 얘기하면 친일파 소리를 듣기 십상이고, 남북한 문제를 다룰 때 동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종북좌파 아닌가 의심한다”고 토로했다. 이념 성향에 따라 상대방을 재단하는 풍토가 퍼져 있다는 지적이다.

 경기대 김기봉 사학과 교수는 “ 탈냉전의 시대가 들어선 지 오랜데 우리의 역사 논쟁은 아직도 냉전 시대에 갇혀 있다”고 했다. “냉전논리에 따른 좌우 대립의 프레임을 깨지 못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 논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한국사 연구의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실 부족한 근·현대사 연구=근·현대사 연구는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취재팀이 국사편찬위원회 의 한국사 DB를 조사한 결과 현대사 연구는 1980년대 들어 크게 늘었다. 70년대 10년간 생산된 논문과 단행본 등 현대사 관련 연구물은 4108건이었다. 이게 80년대에는 1만4737건으로 늘었다. 전체 역사 연구 건수가 70년대 1만1452건에서 80년대 2만8524건으로 급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현대사 연구 증가폭은 전체 역사 연구 증가폭을 훌쩍 뛰어넘는다.

 현대사 분야는 역사학계에서 70년대까지 ‘금단의 땅’이었다. ‘역사는 100년이 지나야 평가가 가능하다’는 말이 경구로 통했다. 당대의 사건에 대해선 종합적인 연구가 축적된 후에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그런 사이 남북 분단과 6·25전쟁, 군사정권의 등장 등 우리 역사의 민감한 내용은 제대로 연구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교과서 전쟁’은 그 부작용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 젊은 연구자들은 과감히 금기를 풀었다. 그들의 스승들도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다. 80년대 이후 현대사 연구가 폭증한 배경이다. 그게 국편 수치의 의미다.

 문제는 연구의 ‘양’이 ‘질’을 담보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대 안병직 명예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의 최근 20년간 석·박사 논문을 살펴보면 사회경제사나 정치사는 별로 없다. 대부분 운동사다”고 지적했다. 팩트를 중시하는 실증주의 대신 저항적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진보 성향 연구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설명이다. 70년대 초·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유신학번’, 80년대 초반의 ‘5·18 학번’ 역사 연구자들의 등장이다. 교과서 집필자 역시 그런 학계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주경철 서양사학과 교수는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편향 공방이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 풍토가 허약하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스스로의 역사 연구 작업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보니 정치 공방에 쉽게 휘둘리거나 성숙한 토론 문화가 자리 잡기 어려운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좌우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자=주경철 교수는 “우리의 역사 연구는 민족주의에 과도하게 매몰돼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사를 세계사와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고 그 관계를 살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한반도 안의 역사 해석을 둘러싼 지루한 샅바 싸움이 이어진다.

 한신대 철학과 윤평중 교수 역시 “좌우 편향성보다 국수주의적 민족사학이 더 문제”라고 했다. 한국사 연구를 한반도 안에만 한정시켜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국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김구의 시도는 높이 평가되지만 국제정세 속에서 활동한 이승만의 시도는 폄하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세대 사학과 설혜심 교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는 반대한다는 전제 아래 “임진왜란 때 포르투갈 등 해외로 끌려간 조선인의 숫자가 10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국경의 틀 안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 좁다. 국경을 뛰어넘는 트랜스내셔널 사관(史觀)으로 눈 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백성호·성시윤·김호정·강태화·윤석만·노진호·백민경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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