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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숨은 편향 … 박정희 사진 1장, DJ 4장, 김일성 3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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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에 언뜻 보면 잘 발견되지 않는 ‘숨은 코드’가 있다. 바로 편집이다. ‘천재교육’ 교과서에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사진이 4회 등장한다. 민주화운동, 베트남 방문, 남북 정상회담 등 대체로 긍정적인 내용이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 당시 군복 차림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사진 한 장뿐이다. ‘쿠데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빼더라도 3회 나오는 북한 김일성 주석보다 비중이 작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1회 등장한다.

역사 교과서, 이참에 제대로 <상>
필진 이념에 따라 휘둘린 교과서
미군, 양민 학살 담은 피카소 그림
진보 측 “표결 결정” 결국 집어넣어
역사·언어는 국민을 규정하는 영혼
뚝딱 만들면 좌편향·우편향 또 논란

 특정 사안에 대한 비중을 사진이나 참고자료 등의 크기와 배치를 통해 차이를 둔 대목들은 여러 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 만들었음에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역사 전쟁’과 교과서 수정 권고를 통해 많이 고쳐졌음에도 그러하다. 이념과 정파를 달리하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좋고 나쁜 감정을 교묘하게 담은 뉘앙스의 차이까지 찾아내기는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같은 민감한 부분까지 공정한 서술과 편집이 이뤄지려면 집필자의 양심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양심에 기대는 것은 그야말로 요원한 일이다.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장을 역임한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도 교과서 편집을 언급했다. 그는 “채택률이 가장 높은 미래엔과 두산동아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 첫 장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악수한 사진을 전면에 배치한 반면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은 조그맣게 나온다”며 “시각적인 면에서 이 책을 접하는 학생들은 대한민국을 마치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건국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8종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 첫 페이지는 대부분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발표에 이어 이미 예고된 ‘역사 전쟁’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인데 좌우 이념을 둘러싼 갈등은 해방 직후의 극심했던 혼란을 재연하는 듯하다. 혼란은 역사 교과서를 놓고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지난 70년 동안 세계 유례가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 낸 대한민국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지만 짧은 기간의 압축성장 못지않게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압축적으로 누적된 아픔 또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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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일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한국사 교과서를 개정할 때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그림이 검정 심의 과정에서 논란이 됐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던 피카소가 6·25전쟁 때 ‘신천사건(미군의 양민 학살)’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표지에도 실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한국의 고교 교과서에 싣는 게 바람직한가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 결국 표결까지 갔고 싣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 검정에 참여했던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줄다리기 끝에 12명의 위원이 표결했는데 7대 5로 넣자는 쪽의 승리였다”며 “보수 정부에서 진행된 검정이었고 교과서 좌편향을 교정하기 위해 우파 학자들이 투입됐는데도 결과가 그랬다”고 했다.

 갈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푸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 갈등 관리 수준을 높이는 일이 절실한 시점이다. 196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한 이인호(서울대 명예교수) KBS 이사장의 지적은 참고할 만하다. 그가 해외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소련에서 56년부터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질 때 폐기됐던 책들이 80년대 한국 운동권에서 역사 교재로 쓰이더라”며 “공산당을 ‘뿔 달린 괴물’로 묘사하고 사회주의 서적을 모두 금서(禁書)로 지정하는 몽매한 수준의 반공교육이 낳은 부작용”이라고 했다. 좌파와 우파의 편향성을 모두 경계하는 발언이다.

철 지난 이념에 얽매어 있는 좌파의 시대착오적 자세도 문제지만 좌파와의 상생을 모색하지 못하는 우파의 포용력 부족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국대 한철호 역사학과 교수는 “논의와 토론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생각만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라며 “교과서 논쟁은 학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이분법적 사고의 극단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신대 윤평중 철학과 교수는 “언어와 역사는 현대 국가의 핵심 요소인 ‘국민성’과 ‘국민’을 구성하는 영혼 ”이라며 “진보든 보수든 정략에 따라 뚝딱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는 시도는 좌편향이나 우편향 교과서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백성호·성시윤·김호정·강태화·윤석만·노진호·백민경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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