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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포니, 91년 알파엔진 … 'R카'는 자율주행 기술 독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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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메르세데스-벤츠의 자율주행차 ‘F015’ 시승행사.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차량은 40㎞ 정도의 속도로 주행했다.

 지난 13일 경기도 의왕시의 현대차그룹 중앙연구소. 주행 시험장에 연구소 신기술이 담긴 ‘R카(Research car·자율주행 파일럿 차량)’가 등장했다. 벤츠 F015처럼 이 차도 자율주행 기능을 장착했다. 현대차의 기술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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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직접 조수석에 올랐다. 연구원이 운전석에서 ‘협로 주행(NPA)’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앞 유리창의 ‘헤드업 디스플레이(HUD)’에서 주변 정보를 제공했다. 현재 시판용 차의 HUD엔 ‘내비게이션·속도’ 같은 단순한 정보를 표시한다. 하지만 ‘R카’에선 차선과 앞차 상황 등을 실사 영화처럼 나타내는 ‘증강현실’ 기술을 구현했다.

 이윽고 차가 스스로 나아갔다. 핸들은 혼자서 움직였다. 바로 앞엔 차량 2대가 2.5m가량 거리를 띄운 채 정차해 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R카’가 안전하게 지나갔다. ‘라이다(Lidar)’ 센서 덕이다. 빛을 쏴서 차량 거리를 재는 장치다. 지능안전연구팀의 이창재 파트장은 “독일 차들의 자율주행 기술이 고속주행에 초점을 맞춘 반면 우리는 혼잡구간 등 도심 저속주행까지 차별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전기차 배터리 개선 등 미래 신기술을 개발 중인 현대차 중앙연구소 . [사진 현대차]

 R카의 지붕엔 주황색 ‘태양전지판’도 달려 있다. 태양광을 전력으로 바꿔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여름철 주차할 때 냉방장치를 가동해 운전자가 돌아오면 시원하게 운전대를 잡게 하는 ‘공학과 감성 결합’의 장치다.

 연구소는 이날 21층을 최초로 언론에 공개했다. 이곳엔 자율주행과 함께 ‘미래 먹거리’로 개발 중인 기술을 모아 놓은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현재 주행거리가 160㎞ 수준인 전기차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선해 ‘리튬공기’ 기술로 500㎞를 달리는 신개념 제품도 개발 중이다. 이용성 환경에너지연구팀장은 “차량의 직류(DC) 전원을 교류(AC)로 바꾸기 위해 아예 ‘전력 반도체’를 직접 만들어 시험할 정도”라고 말했다. 계기판부터 공조장치·오디오를 하나의 디스플레이로 연결해 만든 조작장치는 손가락으로 편하게 작동했다. 중앙연구소는 2009년 출범했다. 세계 최초로 ‘수소 연료전지’ 양산을 주도한 임태원 소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독일·일본 차와 비교해 전반적인 제품 수준은 올라갔다”면서도 “하지만 ‘기초기술’에선 아직 차이가 있어 정부·대학이 물리학·화학 쪽 인재를 더 많이 공급해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임 소장의 ‘위기의식’은 세계 자동차 산업의 무한경쟁에서 비롯된다. 현대·기아차는 세계적으로 연간 800만 대가 팔린다. 세계 5위까지 올라왔다. 현대차는 창립 직후인 1960년대 말 허름한 공장에서 고작 연간 3000대를 만들던 회사였다.

 ‘원조 자동차 강국’의 수성 전략은 만만치 않다. BMW는 최근 기함인 ‘7시리즈’를 공개하면서 운전석에서 버튼에 손대지 않고 손짓만으로 작동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현대차가 내세우는 수소차만 해도 일본 도요타의 ‘미라이’가 올 하반기 북미 진출을 앞두면서 ‘투싼ix 수소차’와 격돌이 불가피해졌다. 자율주행차 역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시장조사업체인 IHS는 2025년 자율주행차 판매가 23만 대에 달할 걸로 본다.

 한국 차의 입장도 그만큼 다급해졌다. 돌파구는 역시 신기술뿐이다. 임 소장은 ‘현대차의 정신적 유산’을 강조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이 맨손으로 ‘알파 엔진’을 개발한 ‘기술 독립정신’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박종서(68) 전 현대·기아차 디자인연구소장은 “쿠페 차량인 티뷰론(96년 출시)을 만들 당시 외판 찍어 내는 ‘금형’ 틀도 없어 일본에서 비싸게 사오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는 “쇠를 제대로 다뤄 본 경험도 없이 힘겨운 엔지니어의 노력으로 국산 금형을 만들어 티뷰론 개발 단가를 크게 낮췄다”고 했다.

 2만 개 넘는 부품도 마찬가지다. 70년대 포니가 도로를 달리던 때엔 부산의 운동화·고무신 업체들이 자동차 고무회사로 변신해 물량을 댈 만큼 척박했다.

 이를 악문 현대차는 파워트레인연구소(84년)→남양연구소(94년)→환경기술연구소(2005년)→의왕 중앙연구소(2009년)로 연구개발(R&D)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기술력을 높이기 위해 ‘사체(死體)실험’까지 할 정도다. 그동안 충돌실험을 할 때는 ‘더미(인체모형)’를 썼지만 인체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사체를 사용한다. 윤리성 논란 등을 감안해 GM·도요타 등과 국제 공동실험을 한다.

 신기술 역량을 키우려면 역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올 상반기에 한국이 전기차를 800대 만드는 동안 세계 5위권 업체들은 평균 1만여 대를 만들었다”며 “노사 관계 불안으로 인건비가 오르고 R&D가 부진해 결국 혁신동력이 저하된다”고 지적했다.

 유지수(전 자동차산업학회장) 국민대 총장은 “정부가 현대차를 지원하면 결국 수천 개 부품 업체도 영향을 받고 그만큼 기술 저변이 두터워진다”고 말했다. 일본은 올해 초 아베 신조 총리가 미라이 ‘1호 수소차’를 인도받을 만큼 적극적 지원사격을 펴고 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구희령·황의영·김기환·임지수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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