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유승민 사퇴 … 그만 싸우고 국정 정상화에 올인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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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어제 의원총회 결정을 받아들여 원내대표직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국민들이 심판해 달라”며 거부권을 행사한 지 13일 만이다. 이로써 극한 대결로 치닫던 거부권 정국도 일단락됐다. ‘메르스와의 전쟁’ 와중에 터져 나온 거부권 파문은 당·청 간, 행정부와 입법부 간 대화의 단절을 불렀고 국민들은 불안해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일단 국정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게 된 건 다행이다.

 하지만 되짚어볼 일이 적지 않다. 열흘 넘게 끌어온 ‘유승민 거취 논란’은 집권 세력에 큰 상처를 남겼다. 우선 새누리당과 청와대 간 대화와 소통의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5월 28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처리하면서 막판에 연계해 처리한 국회법 개정안 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집권당 지도부는 180도 다른 소리를 했다. 평소 대통령과 집권당 지도부가 국정을 놓고 무릎을 맞대 가면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이해와 협력을 구했더라면 이런 식의 불통과 불신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쌍방향 대화보다는 일방통행식 지시와 보고에 익숙한 박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도 문제지만 사전 조율 없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국정 노선과 다른 얘기를 하는 집권당 원내대표의 모습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국정을 함께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반목함으로써 국민을 실망시키고 불안하게 했다. 당사자들의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은 어제 비공개 의원총회를 열어 표결 없이 유 원내대표 사퇴 권고안을 추인했다. “새누리당의 미래와 박근혜 정권의 성공을 위한 방안으로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권고키로 했다”는 게 표면적 이유다. 의원들의 투표로 원내대표가 선출됐기 때문에 의원총회에서 결자해지하는 모양새를 통해 형식과 절차는 어느 정도 갖춘 셈이 됐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청와대를 등에 업은 친박계의 사퇴 압박에 밀려난 것이나 다름없다. “내용적으론 탄핵”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13일간 집권 세력이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유 원내대표가 사퇴하더라도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 그리고 유력 정치인들과 중진들이 지혜를 모아 대화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일 것을 주문해 왔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끝내 외면받았다.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한 유 원내대표의 고별사는 그래서 또 다른 논란거리로 남았다. 앙금이 풀리긴커녕 더 쌓이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로 새누리당과 청와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불통과 불신의 장벽이 해소될지는 의문이다. 감정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친박-비박계가 내년 총선의 공천을 놓고 다시 충돌할 수도 있다. 공천 갈등까지 겹칠 경우 박 대통령의 국정 개혁 과제는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집권 3년 차를 맞은 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개혁을 강조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내년엔 ‘국정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총선이 예정돼 있다. 앞으로 6개월이 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대통령이 힘을 발휘해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집권당의 뒷받침과 국회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국정 정상화를 위해 합심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선 꽉 막힌 당·청 간 대화 채널을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 50일 넘게 공석인 정무수석을 하루속히 임명해 소통 공백을 해소하는 게 절실하다. 박 대통령은 앞서 외교관 출신과 여성 의원 출신을 정무수석에 발탁했지만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을 끌어내진 못했다. 새 정무수석은 무엇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행정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화론자, 화합론자를 기용하는 게 좋다.

 삼권분립 훼손 논란을 빚어온 김재원·윤상현 의원의 정무특보 겸직은 이참에 해제하는 게 좋다. 새누리당 의원이기도 한 두 정무특보에 대해선 임명 초부터 “헌법기관으로서의 독립성이나 삼권분립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거셌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달 겸직 허용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거부권 정국을 거치면서 이들의 역할에 한계가 드러난 만큼 스스로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와 국회의 소통 강화를 위한 목적이라면 청와대는 논란이 많은 의원 겸직 특보를 두기보다 정무장관이나 특임장관을 부활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대통령도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당·청 간의 불협화음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만난 여야 대표에게 등을 돌리고 국회의장의 대화 제의를 외면하는 꽉 막힌 대통령의 이미지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 이번 사태가 국정이 정상화되고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