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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의 몰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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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로이드 조지.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이름들일 겁니다. 영국의 오늘을 있게 한 대정치인들입니다. 자유당 소속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도 한때 몸담았지요. 당명이 낯설다고요? 그럴 겁니다.

 자유당은 200여 년간 보수당과 함께 권력을 분점하며 대영제국을 만들어낸 정당입니다. 1910년대까지도 압도적 과반 정부를 꾸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22년부터 제3당으로 밀렸습니다. 그러곤 양차 세계대전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 등 사회적 격변 과정에서 몰락했습니다. 신생 정당인 노동당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보수당-자유당 체제는 보수당-노동당 체제로 대체됐습니다.

 서울대 강원택 교수는 “대안 세력이 등장한 마당에 유권자들은 자유당이 변화되어 돌아오길 그리 기다려주지 않았다”며 “한때 아무리 위대한 정당이었다고 해도 그 정당이 대중의 신뢰와 기대감을 잃게 되면 정치적 몰락은 불가피한 것”(『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이라고 썼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요즘 반면교사로 거론되곤 하는 ‘자유당의 몰락’입니다.

 그게 과거형이 아닙니다. 어제오늘 영국 총선 과정에서 또 벌어졌습니다. 수십 년 만에 어렵사리 수렁에서 빠져나온 자유당이 더 깊은 곳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참패했습니다. 변화를 거부했냐고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였습니다.

 자유당에 다시 유권자의 시선이 머물기 시작한 건 88년 사회민주당과의 합당 이후입니다. 자유민주당입니다. 첫 선거인 92년 20석을 차지했고 그 후엔 50~60석 정당으로 커졌습니다. 2010년 총선에서도 59석을 획득, 보수당의 연정 파트너가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시내각 이후 첫 연정 실험이었습니다. 자민당으로선 70여 년 만의 국정 참여였습니다.

 자민당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곤 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이코노미스트 등 유력 경제지들이 선거 과정에서 보수당-자민당 연정을 지지했을 정도로 성적표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유권자는 냉랭했습니다. 연정을 낯설어한 지지자들이 결국 보수당으로, 노동당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번에 획득한 의석은 10석 밑, 출발선에 섰을 때보다 더 초라해졌습니다.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을 겁니다. 닉 클레그 당수에게 선거 전에 “질 텐데 연정에 참여한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누가 물었습니다. “천만에”라고 하곤 말을 이었습니다. “자민당은 무정형이었고 좌편향이었다. 반대표를 끌어모으는 데 골몰했다. 이제는 중도며 자유주의 가치에 충실해졌다. 정당으로서 순도가 높아졌다.”

 참패 후에 그는 "재난적 패배에 가슴이 무너진다”면서도 "우리 당으로선 암흑의 시간이지만 우리 자유주의 가치가 하루밤에 소멸되게 할 수도,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동역학이 부럽습니다. 정당인들의 신념과 노력도입니다. 자꾸 우리네 쪽을 돌아보게 됩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