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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지진과 함께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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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
도쿄 특파원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66세 일본 남성이 말한다. 평생 바닷가에서 살다 4년 전 모든 걸 잃었다. 부인과 어머니, 손자는 쓰나미에 휩쓸렸다. 22m의 파도가 6.4m의 제방을 넘어 마을을 삼켰다. 주민 1280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하지만 그는 마을 앞에 14.5m 높이의 방조제를 쌓는 건 반대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손자가 “할배~”라고 부르며 금방이라도 아카하마(赤浜) 앞바다에서 헤엄쳐 나올 것만 같단다. 해안도로를 11m 높이로 올려 건설하는 방안도 달갑지 않다. “그래도 자연을 이길 순 없는데.” 그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지난 2일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아카하마 로큰롤’이 처음 상영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큰 피해를 본 이와테(岩手)현 아카하마 주민들의 힘겨운 복구 과정을 담았다. 영화 후반부, 마을에선 로큰롤 축제가 열린다. 아픔을 딛고 희망을 노래한다. 30대 어부는 “바다는 농장과 같다. 바다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감독 고니시 하루코(小西晴子)는 “가을에 연어가 강으로 돌아가듯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던 한 주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인에게 자연은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보름 전쯤 서울에 있는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배, 얼마 전 돌고래들이 집단 폐사한 일 있죠. 일본 현지에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요.” 지난달 10일, 도쿄 북동쪽 해안가로 몰려든 돌고래 수백 마리가 떼죽음당한 기사를 본 모양이다. “지진 전조라고, 하도 그래서요. 부모님이 일본 여행을 가실 예정인데 걱정이 많네요.” 지진 가능성을 예단하긴 힘든 상황. “글쎄, 별일 없을 거야”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사흘 뒤 오키나와(沖繩)현 남쪽 바다에서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했다. 큰 피해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쿄 생활 10개월째, 지진은 삶의 일부가 됐다. 한 달에 한두 번쯤 지진을 느낀다. 2층 목조건물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처음 경험한 흔들림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 살기 위해선 지진에 무뎌질 필요도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지진의 공포를 마냥 끌어안고 사는 건 힘들다. 일본인들도 굳이 지진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말을 꺼내 봐야 뾰족한 해법이 없다.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엔 은퇴 후 외국에 나가서 살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럴 수 없다면 헬멧과 식수, 식량, 라디오 등 비상물품을 잘 챙겨 두는 수밖에 없다. 지진 방재훈련에 열심히 참가하고 집을 고를 때는 내진(耐震) 등급을 꼼꼼히 확인한다.

 앞으로 30년 안에 도쿄 등 간토(關東) 지방에서 규모 6.8 이상의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50~60%라는 예측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일본인 친구에게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의 내진설계와 방재기술, 철저한 대비 태세를 믿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지진, 막을 순 없지. 인간의 힘으로는….”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