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잔혹동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돌아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았다. 격렬한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원조 중2병 환자’였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었고, 문제가정도 폭력부모도 전혀 아니었지만 내상은 심했다. 멀쩡한 ‘부모의 부재 혹은 죽음’을 모티브로 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조숙하고 불안한 나를 각별히 배려하는 담임에게도 죽어라 싫은 티를 냈다. ‘어른’이란 불가해한 세상 앞에서, 한편으론 빨리 어른이 되고 싶고, 다른 한편으론 어른들이 끔직했던 것 같다.

 최근 ‘잔혹동시’ 파문에 휘말린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읽는다. 10살짜리 초등학생 소녀가 쓴 동시집 『솔로 강아지』에 실린 시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이렇게//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이빨을 다 뽑아버려”. 입가에 피 묻은 소녀의 모습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충분히 충격적이다. 섬찟하다. 제 정신인가 싶기도 하다. 출판사는 동시집을 전량 회수 폐기키로 했다.

 하지만 30년도 더 지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이 시를 쓴 소녀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시인이기도 한, 소녀의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중엔 아이가 얼마나 학원 가기 싫었으면 그랬을까 미안했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엽기호러 코드’의 시라고도 했다.

 내친김에 다른 시들을 읽어본다. 패륜아니 사이코패스니 하는 누리꾼들의 질타가 무색하게 너무나 잘 쓴 시다. “눈 밑으로 눈물이 흘러 생긴 삼각형/얼굴은 역삼각형//눈물과 얼굴이 만나/삼각형이 되어버린 표범”(‘표범’), “강아지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외로움이 납작하다”(‘솔로 강아지’), “상처딱지가 떨어진 자리/피가 맺힌다…모든 시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 등이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성기완은 “랭보가 열여섯에 ‘술 취한 배’를 썼는데 우리 같으면 너 술 먹었지, 알코올 중독 검사 받아보자 했을 것”이라며 “재능이 사이코패스로 매도돼 안타깝다”고 썼다. “우리가 아는 뻔한 동시가 아니”라는 평론가 진중권의 말은 더욱 본질적이다. “어린이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는 어른들의 심성에는 심하게 거슬릴 것”이라고 했다. ‘순수한 동심’이라는 어른들의 판타지를 깬 것이 이번 ‘잔혹동시’ 논란의 핵심이란 얘기다. 그는 “어린이는 천진난만하지 않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더럽고 치사하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부끄럽지만 나도 해봐서 안다.

양성희 논설위원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