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박물관의 육성|노계원<본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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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가경제가 향상되고 국제화의 폭이 확대되는 것과 병행하여 문화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제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질을 생각하게되고 학문과 예술 같은 정신 문화적 관심과 요구가 증대되고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두드러진 현상가운데 하나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증가와 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박물관의 용모나 내용을 그런 대로 갖추고 있거나 박물관 기능을 하는 미술관을 합하면 1백여 개에 이른다. 이중에는 국립·공립·대학·사설 등이 포함되며 최근에는 경제계에서 업종별로 그 역사를 정리하는 박물관이나 은행·증권·관세 등 특수분야의 박물관까지 세워지고있어 일종의 박물관 붐을 이루는 감도 없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서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법적 근거가 될 박물관법이 성안되고 공청회까지 가졌으니 때늦은 감은 있으나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에 박물관이 겨우 1백여 개에 불과하다는 현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먹고살기」에 바빴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는 충분한 변명이 되질 않는다.
역사적 유산에 대한 공공적 관심의 부족과 개인 소장품의 가보관념이 강한 국민적 특성도 큰 이유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게다가 안전하고 믿을 만한 박물관마저 드물어 중요한문화재가 유실되거나 손상을 입어 파기되는 일이 적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모처럼 마련되는 박물관법은 그 방향을 규제보다는 육성과 장려에 두어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선 박물관의 숫자적 확보를 위해서는 허가제보다는 신고제가 바람직하다. 설비가 완벽하지 못한 과도기적인 박물관 형태라 하더라도 그 개설을 활성화시키려면 시설기준이 너무 까다로와서는 불가능하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정·촌 단위까지 합하여 전국에 1천 7백여 개의 박물관이 있고, 해마다 1백여 개씩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들이 대부분 지방에서 유서 깊은 고옥을 손질하여 이용하고 있다 한다. 설비가 완벽하고 호화로운 종합박물관도 좋지만 영세한 지방재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뜻 있는 사람들의 소규모 개인미술관이나 지방행정단위의 향토박물관을 장려함으로써 사장돼있는 문화재가 국민공유의 재산으로 햇빛을 보도록 하고 그 지방의 풍물과 민속이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학문적인 차원에서도, 문화를 이해하고 즐기며 살아간다는 국민일반의 욕구충족이란 면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 지방에 있는 유서 깊은 옛 건물을 박물관으로 이용할 경우 건물 신축비가 절감된다는 이점 외에도 원래 주민들과 친숙한 건물이므로 주민들이 가벼운 기분으로 출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지방박물관은 그 지역의 지방자치단체가 주축이 되고 그 지역출신의 기업인의 도움을 받아 기업이익의 지역환원을 유도해도 가능할 것이다.
기부금·부담금 등의 형식으로 지역주민이 응분의 수익자 부담을 하는 방법도 있다.
건물이 마련되면 박물관의 성격은 관광용이 아닌 「향토형 박물관」으로 하고 발굴과 수집의 노력만 계속하면 숨겨져 있는 문화재를 계통적으로 모으는 일은 역시 그 지역 주민들의 협조와 노력에 달린 문제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박물관의 개설에 대한 투자, 수장품의 공개와 증여·대여 등을 유도하기 위한 세제혜택이 보장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에 재정 되는 박물관법이 타성적인 행정력의 규제기능에 주안을 두지 않고 육성과 장려를 지향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그리하여 지방 구석구석까지 다양한 박물관 문화가 꽃피게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 후손에 대한 값진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노계원<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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