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시민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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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인간의 행위규범 가운데 정의나 용기·의무·동정 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러한 규범들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비 도의적이거나 실격한 인간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민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범주의 행동규범은 민주시민의 자격 요건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대낮 한길에서 행인의 금품을 앗아 칼을 휘두르며 달아나는 흉악범을 위험을 무릅쓰고 끈질긴 추격 끝에 붙잡은 용감한 시민들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는 것은 밝은 시민사회를 위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어떤 시민은 강도를 쫓다 부상해 두 달 째 투병 끝에 직장도 잃고 치료비가 없어 집에서 몸져 누워있는 의로운 시민도 있다고 한다.
버스 안에서 옆 사람이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골목에서 『사람 살리라』는 부녀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도 선뜻 나서지 않고 구경만 하고 지나쳐온 것이 종래의 일그러진 시민상이었다.
특히 아파트단지나 고급 주택가에 강도가 들면 『도둑이야』고 고함을 지르면 꿈쩍 않던 이웃들이 『불이야』하고 소리치면 당장에 뛰쳐나온다는 말까지 유행하는 각박한 세태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이웃간의 담장이 높고 의로움과 협동의 문이 좁았던 것이다.
이러한 세태에서는 시민상호간의 연대의식이나 우리 고장을 함께 가꿔나가겠다는 협동정신이 우러나올턱도 없거니와 삭막하고 황폐해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때에 의롭고 용기 있는 시민의 잇단 출현은 시민정신의 참모습을 확인하는 것 같아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범죄나 사회악의 근절은 경찰이나 그 밖의 사직기관 단독으로 할 수 없다.
경찰의 감시의 눈이 아무리 삼엄하더라도 시민의 협조 없이는 뿌리를 뽑을 수 없는 것이다. 대낮 강도가 아무리 대담무쌍하더라도 주위에 둘러선 시민들이 용기 있는 시민들이라고 여겨질 때는 선뜻 범행에 나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찰의 범죄예방활동은 단순히 순찰활동의 영역을 벗어나 더 많은 용감한 시민의 출현을 북돋우고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강도를 쫓다 칼에 찔린 용감한 시민이 아무도 돌봄이 없이 치료비를 대느라 가산을 날리고 직장마저 잃고 누워 있다는 것은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이 용감한 시민은 경찰이 해야할 일을 스스로 감당하다가 부상한 것이다. 일종의 공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시민에게 치료비는 물론 표창을 해주고 응당한 포상을 해주기는커녕 직장까지 쫓겨난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경찰이 범죄예방 활동의 참뜻이나 시민정신 고취의 역활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용감한 이들에게 좌절 대신에 더 한층 용기를 심어주고 사회의 귀감으로 내세워 줄 때 밝고 명랑한 사회는 이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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