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유 외치던 아베, 비판 여론에 재갈 물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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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집권 자민당이 방송사의 프로그램 내용을 문제삼아 방송사 간부를 불러들이는 이례적 조치에 나섰다.자민당은 17일 당내 기구인 '정보통신전략 조사회'에 민영방송인 TV아사히와 NHK의 간부를 불러 보도경위를 캐묻는 '사정(事情) 청취'에 나선다고 일 언론들이 16일 일제히 보도했다. 방송업무 관련 행정 부처인 총무성이 아닌 '집권당'이 방송사의 보도를 문제삼아 사실상의 소환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도쿄신문은 "정당이 개별 프로그램 내용까지 문제삼는 건 헌법이 보장하는 '보도의 자유'에 대한 압력으로 여겨질 수 있다"며 "방송업계나 정치권으로부터도 '자민당은 도를 넘어섰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 1야당인 민주당의 아즈미 준(安住淳) 국회대책위원장은 15일 "언론의 자유라고 하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지켜야하는 영역을 침범할 우려가 있다"고 비난했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정권은 한국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사고 당일의 행적을 문제삼은 산케이(産經)신문 전 서울지국장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자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상식"이라며 한국을 강력하게 비난해왔다. 출국금지가 풀려 14일 귀국한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전 서울지국장에 대해선 15일 직접 총리 관저로 불러 환대하기도 했다.

자신이 아끼는 여당지의 '한국 비판'에는 '언론 자유'란 잣대를 들이밀고, 정권에 비우호적인 일본 언론의 '아베 비판'에는 '사정 청취'란 수단을 통해 사실상의 압력을 가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자민당이 문제삼은 것은 TV아사히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보도 스테이션'과 NHK의 시사 프로그램인 '클로즈업 현대'. '보도 스테이션'에선 지난달 관료 출신의 해설가 고가 시게아키(古賀茂明)가 생방송 중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을 비롯해 총리관저 측으로부터 상당한 (프로그램 하차) 압박을 받았다"는 취지의 돌출 발언을 했다. 뉴스 캐스터가 이를 반박했지만 고가는 개의치 않고 'I am not ABE'라고 쓴 종이를 들어보이는 등 정권 비판 발언을 이어갔다.

'클로즈업 현대'는 지난해 5월 사기 사건 문제를 다루면서 익명의 남성을 사기 브로커로 출연시켰는데 실제로는 그가 기자의 부탁을 받고 가공의 인물 역할을 한 것이란 의혹이 최근 제기됐다. NHK 사내의 조사위원회는 "이 남성이 브로커 역할을 하도록 기자가 관여했다고 볼 근거가 불충분하지만 사기 집단의 활동 거점으로 소개된 장소가 사실과 다르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자민당은 이들 사건으로 생긴 논란에 관해 해당 방송사로부터 설명을 듣겠다는 것이지 압력은 아니란 입장이다.

하지만 나가타 고조(永田浩三) 무사시(武藏)대 교수(미디어 사회학)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 "예전에는 (권력이) 뭔가 숨기면서 TV방송사에 보이지 않게 압력을 가해왔지만 지금은 마치 공정한 재판을 하듯 대놓고 공적인 장소에서 보도내용을 비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스가 관방장관은 최근 TV아사히 건에 대한 언급 도중 "방송법이라고 하는 법률이 있다"며 방송사에 '협박'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도 했다. 방송면허 취소권을 쥔 정권의 무언의 압력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이 같은 논란이 확산되자 "(내 발언이) 프로그램에 대한 압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방송국 사람들이 그 정도로 위축되는 사람들이냐. (자신에 대한 비난이) 정말 한심하다"고 반박했다. 민영방송의 한 간부는 "집권당에 불려가는 것은 방송국으로선 '옐로카드'를 받는 것과 같다"며"언론은 권력을 감시할 의무가 있는데 '안전운전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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