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완구 수뢰 의혹, 성역 없는 수사로 국정마비 막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인 이완구 국무총리가 14일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 총리는 그동안 “성 전 회장과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며 관련성 자체를 부인해 왔다. 하지만 마당발 인맥을 자랑해 온 성 전 회장이 동향에 연배도 비슷한 이 총리와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총리가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낙마 위기에 몰리자 성 전 회장이 충청 인사들을 앞세워 강도 높게 지지운동을 벌인 사실도 확인됐다.

 성 전 회장의 폭로가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돈의 액수와 장소, 시점을 특정한 데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1억원 수뢰 의혹처럼 성 전 회장의 주장 일부는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이 총리는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직전 이 총리를 여러 번 거명하며 원망의 뜻을 표시했다고 공개한 태안군 의원 2명에게 15번이나 전화해 “다른 얘기 한 것은 없나”고 캐묻기도 했다.

 그런 만큼 이 총리의 수뢰 의혹에 합리적 의심을 품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이 총리의 언행을 보면 “절대로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했던 사안들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가 많았다. 인사청문회에서 병역 기피·땅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앞뒤가 안 맞는 해명으로 일관했다. 또 그런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 간부들에게 전화해 기사를 빼라고 압박한 사실이 보도되자 부인했다가 녹취록을 통해 거짓말임이 들통 나 사과했다. 며칠 전엔 “2012년 대선 때 암 투병 중이라 유세를 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충청 지역에서 세 차례 이상 박근혜 후보 지지 유세를 한 사실이 확인돼 또다시 망신을 당했다. 그런 만큼 이 총리가 ‘목숨’ 같은 극단적 표현까지 쓰며 결백을 주장할수록 국민의 의혹은 더욱 증폭될 뿐이다. 지금 이 총리가 할 일은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경망스러운 처신이 아니다. 국정 2인자의 양심을 걸고 자신에 제기된 의혹 하나 하나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죽음을 각오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총리가 금품 수뢰 의혹에 휘말리고, 여당이 “총리부터 수사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 자체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행정 수반으로서 이 총리의 권위는 이미 크게 실추됐다.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국정 마비와 국격 실추로 이어질, 국가적 비상사태다.

 이 총리가 속히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아야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즉각 수사를 개시해 진상을 파헤쳐야 국정위기를 막을 수 있다. 이번 사안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도 공소시효가 5년이나 남아 있다. 이미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의심스러운 돈 32억원을 찾아냈다. 이 돈의 흐름을 추적하면 수뢰 의혹 단서가 나올 수도 있다.

또 성 전 회장이 누군가와 함께 이 총리의 선거사무소를 찾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선거사무소의 속성상 목격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검찰이 이런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이 총리 의혹을 제대로 파헤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이는 드물다. 검찰이 총리를 일반인 다루듯 자유롭게 수사할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 총리는 회의에 불참한 장관을 엄하게 질책하며 ‘군기반장’을 자임해 왔다. 또 성 전 회장과의 대화를 밝히기 거부한 태안군 의원에게 “내가 총리다. 내게 다 얘기하라. 5000만 국민이 시끄럽다”고 고압적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권위적인 언행을 검찰수사 때도 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기 어렵다. 이 총리가 수사를 앞두고 총리 지위와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든지, 아니면 당장 특검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그런 만큼 검찰은 사즉생의 각오로 의혹을 파헤쳐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한 ‘성역 없는 수사’ 1호는 이 총리 수사가 돼야 한다.

이 총리 의혹을 제대로 수사해야만 성완종 리스트에 거명된 다른 실세들은 물론 야당까지 무한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다짐이 진정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도 이 총리 수사에 대해 청와대가 일절 보고받지도, 알아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 총리도 검찰의 수사에 성실히 응해야 한다. 만에 하나 “현금 수뢰의혹 사건의 속성상 물증을 찾기 힘들 것”이란 얄팍한 계산 아래 보여주기식 대응으로 일관한다면 국민여론은 악화될 것이다. 이 총리는 법리로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도 민심의 추상같은 심판을 피할 길은 없을 것이다.

 ‘부패 척결’을 다짐한 총리가 부패척결 수사의 핵심 대상이 된 건 나라의 총체적 위기를 상징한다.

성 전 회장이 이 총리를 비롯한 권력 실세들에게 줬다고 주장한 돈은 정치인들이 수백억원씩 차떼기로 받았던 과거에 비하면 적은 액수라지만, 2000원 오른 담뱃값에도 호주머니를 걱정해야 하는 서민들로선 피를 토할 일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개발연대 시대에 성장한 엘리트들의 부패와 권위의식이 켜켜이 쌓인 끝에 터져 나온 추악한 자화상이다. 검찰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폭발 직전 상태에 이른 국민의 정부 불신이 사그라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청와대와 국회, 검찰이 절체절명의 각오로 이번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