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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전히 칭찬의 힘을 믿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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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신예리 기자 중앙일보 차장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카메라보다 악플이 더 무서웠다. 신문 기자에서 방송 기자로 변신한 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낯설던 카메라는 3년여 마주하다 보니 3년여 알고 지낸 사람, 딱 그만큼은 편해졌다. 반면 악플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다. “왜 여자가 남자보다 말을 더 많이 하나” “진행을 그렇게밖에 못하면서 왜 거기 앉아 있나”… 시청자 게시판에 간간이 올라오는 호된 비판은 번번이 나를 곤두서게 한다. 어쩌다 한 번 칭찬이 눈에 띄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없던 보조개마저 파일 지경이다. 하지만 가물에 콩 나듯 할 뿐 대개는 속을 할퀴는 말에 쓴 침을 삼키기 일쑤다.

 유명 인사도 아닌 내가 이런데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는 연예인들은 어떨까. 종종 가수나 배우는 노래 잘하고 연기 잘해서가 아니라 욕 먹는 대가로 돈 버는 거란 생각이 들곤 한다. 최근 예능 프로 ‘무한도전’에서 새 멤버를 뽑는 심사 중 심장박동수 측정기를 달고 ‘악플 읽기’를 시키는 걸 봤다. “쟤, 이미 유통기한 한참 지난 거 아냐” “실생활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완전 비호감 스타일”… 아무리 불쾌한 댓글에도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 시쳇말로 ‘멘털 갑’을 선발하겠다는 거다. 악플의 쓰나미를 이겨내지 못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하는 게 그 세계의 생리이기 때문이라나.

 어디 연예계뿐일까. 남들이 툭툭 던지는 말에 일일이 상처받는 ‘유리 멘털’ ‘두부 멘털’이라면 버텨내기 힘든 세상이다. 술자리 뒷담화도 모자라 카톡이며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클릭되는 ‘디지털 입방아’까지 신경써야 하는 시대 아닌가.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몇 달째 부동의 베스트셀러인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게다. “남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버려라. 미움 받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진정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역발상을 요구하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제안에 다들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란다.

 근데 난 아니었다. 구구절절 맞는 소리 같긴 한데 도저히 실천할 자신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같은 범인은 ‘칭찬 대신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 보려고 애쓰다 좌절해서 울화통만 터뜨릴 게 뻔하다. 오랜 세월 누군가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작두 위라도 성큼 올라탈 자세로 살아온 나다. “칭찬엔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아무리 저명한 심리학자가 회유한들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힘든 노릇 아니겠나.

 뇌 속에 아난다마이드(anandamide)란 물질이 남보다 유난히 많이 생산되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유전적 돌연변이 탓인데, 이런 이들은 스트레스도 덜 받고 속된 말로 ‘뽕이라도 맞은 듯’ 즐거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천연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아난다마이드의 어원은 바로 행복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난다(anada). 이 ‘유전적 로또’에 당첨되는 비율은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인종에 따라 차이가 꽤 크다고 한다.

 그런 엄청난 행운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인공 아난다마이드’인 칭찬이 꼭 필요한 게 아닐까. 십수 년 전 유달리 칭찬에 인색한 팀장과 일한 적이 있다. 후배들을 타박만 할 뿐 한 번도 치켜세워 주는 법이 없는 분과 함께하는 나날은 우울하고 비참했다. 견디다 못해 당돌한 제안을 던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꾸중보다 칭찬을 해주시면 저희가 더 잘하지 않을까요?” 뒷일은 상상에 맡긴다. 아무튼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부장이 된 지금, 난 칭찬을 입에 달고 살려고 노력한다. 후배들이 맘껏 춤추길 바라면서.

 사실 많은 사람도 필요 없다. 의미 있는 몇 명, 아니 단 한 명의 칭찬이면 족하다. 얼마 전 아직 신혼인 여자 후배의 신랑이 그녀를 ‘한예슬과 송혜교, 손예진을 합쳐놓은 것 같은 여자’라고 부른다는 얘길 들었다. 그 후배가 늘 행복해 보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러니 오늘도 여기저기서 욕 진탕 먹었을 그(그녀)의 하루를 칭찬으로 마감해 주면 어떤가. 행복학 개론이 넘쳐나는 시대, 내가 굳이 보태고 싶은 한마디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