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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경계서 느끼는 아찔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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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도시를 걷는 것도 괜찮다. 예전 느낌이 그런 대로 남아 있는 동네도 꽤 있어 자동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길을 만나고, 그러다 운 좋게 막다른 길에 들어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칠 것 같다. 눈이 흐려지며 괴상하게 나이 들어가는 나를 보고 아이는 손가락질을 하며 깔깔 웃어 젖히겠지. 내가 그렇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나도 통쾌하여 함께 웃고 싶을 것이다. 그런 시간의 원근법이 작동하는 곳을 찾아 걷는 것이다.

 그러다 가까운 산을 찾는 것은 이보다 조금은 강력하게, 콘크리트에 기대 지속되는 일상 자체와 거리를 두어 보려는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일상의 공간 안에 있으면 마음만으로는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다. 그러던 것이 시멘트가 끝나고 흙길이 비탈을 이루는 곳을 만나면 벌써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다. 심산유곡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번잡한 도회지에서 나서 평생 그곳에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도시의 경계에 있는 이런 곳이 필요하다. 한 시간 남짓 올라가 나를 담고 있는 도시를 조금 떨어져 한 덩어리로 내려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만 돌리면 일상의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라 해도 일상의 바탕에 있는 안전이라는 환상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길로만 조심해서 다녀도 험한 꼴을 꽤나 보게 된다. 강한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내 무거운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늘 다니던 곳이 눈에 덮여 뻔한 길이 사라지는 바람에 막막한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언젠가 어떤 아버지는 아들이 비탈진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어, 어 하고 소리만 지를 뿐 꼼짝도 못했다. 밑에 있던 사람이 아이를 잡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그 큰 짐을 어찌 지고 살까. 어느 가을날 산을 거의 내려왔을 즈음 커다란 멧돼지 몇 마리가 그야말로 저돌적으로 부자 동네를 향해 달려 내려가는 광경이 눈에 띄었을 때는 스르르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알량한 허세가 다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경계를 넘어서면 가만히 있어도 이 도시가 꿈틀거리는 자연을 시멘트로 잠시 눌러 덮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 마음을 졸이게 하는 아찔한 일까지 보태지면, 그런 경험은 언뜻 딴딴해 보이지만 기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늘 잠복해 있는 위기의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나 자신은 더욱더 작아 보이게 된다. 평소 과대망상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작은 이익과 안정을 절대시해야만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서는 마음의 축척이 틀어져 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작아 보이는 것 또한 곤란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느 날 동료가 새벽 산책길에 찍어온 사진에는 벼랑 위 산성 옆에 빈 소주병과 누군가 벗어둔 낡은 등산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산에서는 맨발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기사들을 뒤적거리게 되고, 결국 보도가 안 된 것을 확인했지만, 그게 아무 일 없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사로 작성할 가치가 없었다는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 떠들썩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얼마 전 정상 근처 평평한 곳에서 쉬고 있던 선배 쪽으로 헬리콥터가 다가온 적이 있다. 찾는 사람인지 얼굴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날 헬리콥터가 찾던 사람은 내가 멧돼지를 본 곳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름 몇 개가 적힌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고서.

 늘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오고, 또 이제 적당한 크기로 줄어들었을 나 자신과 합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미 불온해진 마음이라 이 또한 만만치는 않아 경계선 근처에서 땀을 씻는 의식을 치르곤 한다. 한번은 탈의실에서 옷을 벗으려는데 손님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박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비스듬히 기운 배가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뜨는 걸 보고 큰 숨을 내쉬며 탕의 뜨끈한 물로 들어갔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쾌감에 눈을 감았다. 그 시간에 수백 명이 차고 검은 물에 잠기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게 꼭 일 년 전 일이다.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