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시오, 이순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광종 감독은 백혈병과 싸우면서도 한국 축구를 걱정한다. [중앙포토]

이광종(51) 전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요즘 매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각급 대표팀을 이끌며 한일전 무패 행진(10경기 8승2무)을 이어가 ‘축구계의 이순신’이라 불리지만 이번 싸움은 여러모로 낯설다. 그라운드 대신 병상으로, 일본대표팀 대신 급성 백혈병으로 장소와 상대가 바뀌었다.

 외부 공기와 차단된 병원 무균실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감독은 병석에서도 여전히 축구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축구인들은 “이 감독은 고집스런 성격 만큼이나 축구 사랑도 남다르다. 그 열정으로 견디면 무서운 병마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16 리우 올림픽에 나설 22세 이하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태국에서 킹스컵을 준비하던 지난 달 27일. 잇몸 염증 치료를 위해 치과에 들른 게 이 감독 삶의 분기점이 됐다. 치료 후 체온이 39도까지 치솟자 응급실을 다시 찾았고,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아 귀국했다.

 갑작스럽게 선장을 잃은 대표팀의 키는 최문식(44) 수석코치가 대신 잡았다. 선수들은 태국 국가대표팀과의 킹스컵 최종전 직전까지 감독의 병명을 몰랐지만 이심전심으로 ‘뭔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깡패축구’ 논란이 불거진 우즈베키스탄과의 1차전(1-0승)에서 상대 선수에게 얼굴을 세 차례나 맞고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심상민(22·서울)은 “화가 치밀었지만 섣불리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감독님께 우승컵을 안겨드리고픈 마음 뿐이었다”고 했다. 한국은 종합전적 2승1무로 2012년 이후 3년 만에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킹스컵 우승 직후 스승의 쾌유를 기원한 연제민. [연제민 페이스북]

 이 감독은 힘겨운 백혈병 초기 치료를 묵묵히 견디고 있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할 정도로 독한 항암제를 하루 세 번씩 맞는다. 머리도 빡빡 깎았다. 병원 관계자는 “정상세포와 암세포를 구별하는 치료제는 없다. 의심이 가는 세포를 모두 없애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면역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환자가 세균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힘든 치료 중에도 이 감독은 한국 축구와 제자들을 걱정하고 있다. 킹스컵 한국 경기도 빼놓지 않고 봤다. 김기동(44) 올림픽팀 코치는 “문병 중 감독님께서 ‘온두라스는 20세 이하 대표팀이 출전했는데,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세계 축구 수준이 점점 높아지는 만큼 우리도 열심히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가슴이 뭉클했다. 와병 중에도 감독님은 축구만 생각하는 듯 했다”고 말했다.

 축구협회는 최근 신태용(45) A대표팀 코치를 올림픽팀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다음달부터 시작하는 리우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을 대비하기 위해 이 감독의 동의를 얻어 발빠르게 움직였다. 축구협회는 또 이 감독이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치료비 전액을 지원키로 했다.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순간은 이광종 감독 지도자 인생의 하이라이트다. [중앙포토]

 이운재(44) 올림픽팀 골키퍼코치는 “감독님은 아시안게임 기간 매일 새벽까지 상대팀 전력분석에 매달렸다. 비디오방(전력분석실)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아 ‘비디오방 매니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다. 그동안 겪은 스트레스야 말할 것도 없다”면서 “누적된 피로가 병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싶어 코치로서 죄송스럽다”고 했다.

 조준헌 축구협회 홍보팀장은 “발병 시점이 국제대회 기간이고, 그간 한국축구에 기여한 공로가 큰 만큼 치료비 전액 지원을 결정했다”면서 “이 감독이 건강을 회복해 다시 그라운드에 서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