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대일 정책에 전략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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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대일정책은 어떤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및 독도와 역사교과서 파동에 대한 노 대통령과 외교부의 반응을 날짜별로 정리해 보면 노무현 정부 대일외교의 '전략 없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해 7월 제주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임기 중에는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큰 인심을 썼다. 그러나 그는 올 3.1절 기념사에서는 제주 발언을 뒤집어 일본은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독도와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내의 격렬한 반일 시위가 있던 시기다.

지난 17일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니까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19일 이런 상황에서 일본 방문은 적절치 않다면서 예정된 한.일 외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닷새 뒤인 24일 그는 일본 외상을 만나 고이즈미가 계속 신사참배를 강행하면 정례적인 한.일 정상회담을 열 수 없다는 말을 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는 굳이 일본까지 가서 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말을 하러 일본에 갔다. 19일과 24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국내 여론이 잠잠했다는 '일'이 있었다. 고이즈미에 이어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까지 떼를 지어 야스쿠니를 참배했는데 한국의 여론이 잠잠한 데 놀란 것은 일본이다. 아사히신문은 23일 한국의 반응에서 일본 비난보다 한국 정부 비판이 더 눈에 띄는 데 주목하고 한국 여론은 체념과 탈력감(脫力感) 속에 직정형(直情型)의 반응을 안 보인다고 보도했다. 잘 봤다.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이 한국 외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한.일관계에 관한 말을 그렇게 가볍게 뒤집어 국민을 혼란시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일외교에 확실한 전략과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팀이 보기에 일본에서는 되찾을 민족.자주가 없다. 동북아공동체 구상에서도 일본은 마이너 파트너일 뿐이다. 언제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한이 없는 우호 협력관계의 증진을 위해서라면 국내 여론 살피면서, 중국 모방 하면서, 편의 따라 자주 말을 바꾸면서 쉬엄쉬엄 가도 큰 문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섬나라 근성의 일본인이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를 숭배할 만큼 반이성적(反理性的)이고 시대착오적이다.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가치를 이해할 비전도 없다. 이웃 나라가 반대한다고 신사참배를 그만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이 앞으로도 수시로 한.일관계 발언에서 냉탕과 온탕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일정책에서 노 대통령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씩 있다. 북핵 해결과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만들기의 큰 목표를 위해서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면 정상회담도 하고 각료급 회담도 한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국내정치에서 사정이 어려워도 일본 문제를 국면 돌파용으로 동원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야 한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가 목표를 초과달성했다고 평가했다. 글쎄요. 대일외교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또 미국의 유력한 상원의원이 한.미관계가 역사적 망각상태에 빠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뭔지 진솔하게 반성하면서 국민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노 대통령의 동북아 새 질서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장기 목표다. 그러나 그것은 한.미.일 공조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