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도서관 도돌이표 … 더 힘든 건 ‘취업 루저’ 자괴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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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른 채 ‘필수 스펙’ 공부에 매달린다. 도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영어 학원에 갈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뿐이다. [김경빈 기자]
취업 준비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홍보실 근로장학생 일도 하고 있다. 나는 인문계 ‘취준생’이다. [김경빈 기자]

오전 8시. 요란한 알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전날 밤 12시까지 공부하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몸이 몹시 무겁다. 26㎡짜리 자취방에 누워 잠시 숨을 고른다.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견뎌야 하나…. 본격적인 취업준비생(취준생)으로 살기 시작한 지 8개월째.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길을 쳇바퀴 돌 듯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어떤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 즈음, 계속 누워 있다간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세수를 대강 하고 허겁지겁 가방을 싼다. 토익 문제집 두 권, 중국어 교재 한 권, 한국사 교재 한 권, 노트북과 충전기, 그리고 연습장·필통까지…. 묵직한 가방이 어깨를 짓누르고, 나는 도서관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긴다.

 찬 공기를 뚫고 10분쯤 걸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방학이지만 도서관은 늘 취준생들로 북적인다. 자리에 앉자마자 중국어 교재를 펼쳤다. 중국어 능력시험인 HSK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2년 전 이미 HSK 5급을 땄지만 아직 부족하다. 5급을 딴 한 선배가 종합상사 최종면접에 들어갔는데 면접관이 ‘왜 최고 등급인 6급이 아니라 5급밖에 못 땄느냐’고 지적했다고 한다. 1~2년 전만 해도 5급이면 취업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스펙이 뛰어난 취준생이 많은 탓에 5급 정도론 명함도 못 내민다.

 중국어 ‘인강(인터넷 강의)’ 동영상을 틀었다. 학원을 다니면 더 빨리 점수가 오르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취업에 필수인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영어 학원도 다니고 있는데 중국어 학원까지 등록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인강을 듣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함께 공부하던 취준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운다. 대다수 취준생은 학교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나는 보통 자취방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 편이다. 집에서 밥을 먹는 게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메뉴는 주로 인스턴트 햄, 즉석식품, 라면 등이다. 취업 준비에 돈이 많이 들어가니 이렇게 식사 비용이라도 아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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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을 먹고 나면 학교로 돌아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취준생에게 아르바이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지방 출신으로 자취를 하는 나는 매달 방세로 50만원을 내야 한다. 공과금과 생활비, 식대, 학원비, 통신비까지 합치면 1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제 스물일곱 살인데 부모님께 무작정 손을 벌릴 순 없다. 생활비라도 내가 벌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 행사 진행 등을 돕는 근로장학생 일을 시작했다. 한 달에 30만원 정도 받는 일이지만 취준생 입장에선 고마운 돈이다.

 일이 끝나면 다시 도서관 열람실로 돌아간다. 오후에는 영어와 한국사를 공부해야 한다. 인문계 전공자들에게 한국사능력시험이나 한자 자격증 같은 스펙은 기본이다. 내가 취업하게 될 직무와 무슨 연관성이 있을지는 전혀 모르지만 누구나 하니까 불안해서 안 할 수도 없다. 오후 내내 도서관에서 영어·한국사 책과 씨름하다 5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볶음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6시에 맞춰 영어 학원에 도착했다. 토익과 토익스피킹을 배우는 강의가 10시까지 계속된다. 내 토익 점수는 800점대 중반 정도다. 친한 친구는 895점인데 서류전형에서 계속 떨어졌다고 한다. 최소 900점은 받아야 할 텐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업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왔다. 밤이 깊었지만 자기소개서(자소서)를 정리하기로 했다. 최소한 수십 개의 자소서를 써야 하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 한다. 취준생들은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부른다. 과장이나 거짓말이 많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과장된 내용으로 글을 쓰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취업하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들 한다.

 오늘도 종일 취업 준비에 매달렸지만 항상 불안하다. 사회학을 전공한 한 친구는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과 탈모까지 앓고 있다. 이공계 전공 친구들이 하나둘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내가 왜 인문계를 택했는지 후회가 된다. 2년째 창문도 없는 고시텔에서 종일 공부하는 친구도 여럿이다. 인문계 취준생들에게도 취업 문이 활짝 열리는 날이 올까. 인문계 취준생으로서 느끼는 열패감이 너무나 크다. 낮에도 지고 밤에도 지는 ‘낮져밤져’의 삶을 사는 ‘취업 루저’들도 많다. 밤은 깊어가고 스피커에선 옥상달빛의 노래가 흐른다.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죽지 못해 사는 오늘/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하드코어 인생아’).

글=윤정민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이 기사는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K씨(27)의 하루를 동행 취재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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