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한 번 빌리는데 … 서명만 34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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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정용운(44)씨는 최근 한 시중은행에서 3년 만기 전세대출을 받다가 짜증 나는 경험을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자필 서명 탓이었다. 은행 직원이 “사인해 달라”며 대출거래약정서·대출신청서·국민주택기금대출상품설명서·개인정보조회동의서 등 끝도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그때마다 서명을 받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정씨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무슨 서류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가 한 사인 횟수는 모두 22번에 달했다. 30여 분간 쉴 틈 없이 서명을 한 뒤 은행 직원은 “3년 뒤에 기간 연장을 하게 되면 열 번 정도 더 사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출자들이 ‘사인 고역(苦役)’에 시달리고 있다.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지며 자필 서명을 해야 할 서류와 항목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다. 1일 금융 당국과 금융권 등에 따르면 대출자들은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대출을 받을 때 최소 9차례, 최대 34차례나 서명을 해야 한다. 국민은행은 한국주택금융공사 재원을 활용한 주택담보대출을 해줄 때 고객으로부터 총 34차례의 사인을 받고 있다. 이 중 필수적으로 서명을 해야 하는 항목만 23개에 이른다. 나머지 11개는 선택사항이다. 이 은행은 은행 자체 자금을 이용한 전세자금대출을 해줄 때도 총 28회의 사인을 받는다. 다른 은행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신규 대출의 경우 하나은행이 9~26회, 신한은행이 10~23회, 기업은행이 9~18회의 서명을 고객에게 요구하고 있다. 고객이 기간 연장을 하게 되면 최대 15회의 사인을 추가로 해야 한다.

 사인이 필요한 필수 서류들로는 대출거래약정서·대출신청서·국민주택기금대출상품설명서·개인(신용)정보조회동의서·개인(신용)정보수집이용제공동의서·신용보증신청서·신용보증약정서·대출상품안내서 등이 있다. 이처럼 서명 항목이 늘어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다. 금융소비자 보호가 중요 이슈로 떠오르면서 금융 당국은 고객에 대한 상품 설명 의무를 강화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대형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서명을 받아야 하는 항목들을 하나둘 추가하다 보니 과도해진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사인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고객 응대 시간이 길어져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우리도 좋아서 받는 건 아니지만 법적 근거가 있는 데다 책임 소재를 가릴 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사인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보호를 받는다는 고객들은 불만이다.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실효성도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씨는 “서명 항목이 너무 많다 보니 내가 무슨 서류에 어떤 이유로 서명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지나치게 형식적인 ‘공급자 마인드’가 아니냐”고 말했다. 금융 당국도 과도한 서명이 고객 편의성과 은행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최근 사인 횟수를 줄이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착수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거나 여러 서류에 산재돼 있는 유사 항목을 하나의 서류로 통폐합해 사인 횟수를 최소화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박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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