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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노는 학문'이라고? 그 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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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

졸업·입학 시즌을 앞둔 이맘때면 12년 전 기억이 떠오른다. 고3 시절 대학교 수시모집 원서를 쓰면서 고민이 깊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역사학도의 길을 가기 위해 인문학부에 지원하려 했지만 주위의 반대에 부딪쳤다. 부모님은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는 게 미래를 위해 좋다”고 권유하셨다. 학교 선생님들도 “꼭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취직 잘 되는 전공을 택하고 역사 수업 몇 개 들으면 된다”고 회유하셨다. 하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았고, 고집 하나로 인문학부에 합격하게 됐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학과 선택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몰래 서양사학과 지원 서류를 내버리고 부모님께 뒤늦은 ‘통보’를 했다. 두고두고 많이 혼났다.

 나는 그저 역사가 좋았다. 어릴 때부터 한국사·세계사 전집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애정이 싹텄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생부 장래희망란엔 항상 ‘역사학과 교수’라고 적었다. 단 한 사람, 단 1초의 차이로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 신기했다. 더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책 속의 역사와 책 밖의 현실은 달랐다. 졸업 이후 진로를 정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인턴·공모전·봉사활동 같은 스펙도 다른 학부 출신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다. 1차 관문인 서류 전형에서부터 연달아 떨어지면서 자신감을 잃었다. ‘어른들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는 후회가 밀려 왔다.

 요즘 주변에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다. 국문과·국사학과를 나와 높은 학점에 영어 점수까지 갖췄는데도 서류 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진다. 인문대 졸업자는 절반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통계가 현실을 보여준다. “인문학을 전공하려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대학 시절 단골 안줏거리였다. 최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지금처럼 모든 대학이 인문대학을 하면 구조조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12년 전 과감히 인문학을 택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문학은 인간과 삶의 가치를 배우는 학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깊고 넓게 만들어 줬다. 얼마 전 만난 학교 후배도 “그나마 대학 4년 동안 인문학을 배워서 다행이다. 살면서 언제 또 배울 기회가 있겠느냐”고 했다.

 부푼 마음과 불안한 심정을 안고 곧 인문대에 진학하는 새내기들에게, 취업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인문대 출신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누군가는 ‘노는 학문’이라고 놀리지만, 그 속에 반드시 길이 있다고.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길게 보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