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서울 와도 노마드 … 짚풀에서 작은 연민을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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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가 돌아왔다. 베를린에서 식민·근대화·이산 등 묵직한 주제를 다뤄온 그가 올해 바라보는 곳은 아시아다. 새로 발견한 재료는 인조짚, 다음달 리움 개인전에서 선보인다. 양혜규가 서울 연건동 작업실서 제작 중인 작품들 사이에 섰다. 왼쪽은 ‘중국신부-앉아있는 여자’, 오른쪽은 ‘바다연꽃’(가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출발은 늘 새롭습니다. 새해를 맞아 ‘2015 또 다른 시작’이란 코너를 마련합니다. 올해 우리 문화계에서 남다른 활약이 기대되는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첫 순서는 미술계의 어엿한 중견이지만 여전히 ‘처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설치미술가 양혜규(44)입니다.

양혜규(44)의 전시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그동안 ‘목소리와 바람’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2009), 카셀 도쿠멘타(2012), 아트 바젤의 ‘언리미티드’(2014) 등 세계적 미술 행사에 참여했지만, 소식으로만 전해졌을 뿐 국내 활동은 뜸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내놓았던 ‘살림’과 2013년 제작한 향신료를 활용한 판화(Spice Moons)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됐다.

양혜규가 돌아왔다. 다음달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서 개인전을 연다. 서도호(53)의 ‘집 속의 집’(2012) 이후 리움이 두 번째로 마련한 한국 현대미술가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199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유학 가 눌러앉은 지 21년 만이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국제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활용하며 활동해 온 ‘노마드 작가’의 귀환이다. 지난 7월부터 서울 연건동에 작업실을 열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출퇴근하고 있다. 서울에 ‘생산기지’를 둔 시민이다. 다음달 11일 리움 전시 개막 후엔 중동으로 날아간다. 3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토후국 중 하나인 샤르자에서 열리는 샤르자 비엔날레(총감독 주은지)에 참여한다. 10월엔 베이징 798 예술구 내 울렌스현대미술관(UCCA)에서 중국 첫 개인전을 연다.

 세밑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첫 작업실 공개다. 상가 3층 작업실 현관문 안쪽엔 ‘殺象思象(살상사상:Shooting the Elephant Thinking the Elephant)’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인조짚이 쌓여 있었고, 철제 가설 책장에는 작업 계획표, 공항버스 시간표 등이 붙어 있었다.

옷걸이에 전구·가발 등을 건 ‘약장수-털투성이 광인 결성’(2010). [사진 런던 자블루도비츠 컬렉션]

 -‘살상사상’은 무슨 뜻인가.

 “이번 전시의 화두다. 지어낸 말이다. 코끼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사자춤도 그렇다. 우리뿐 아니라 중국·일본에서도 발견되는 민속 현상이다. 과거 아시아에서는 이곳에 없는 동물의 힘을 믿고, 그걸 불러들이며, 그 동작을 상상하며 살았다. 이 새로운 것들이 변화를 이끌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는 블라인드, 빨래건조대, 카드고지서 봉투, 스팸 통조림 등 건조한 공산품에서 연민을 찾고 작은 역사를 발굴한다. “삶에서의 자극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생활을 단순화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발견한 새 재료는 인조짚이다. 바퀴 달린 옷걸이에 짚을 엮어 씌운 설치에는 ‘중국 신부’ ‘바다 연꽃’ 등의 제목이 붙었다.

 - 왜 짚풀인가.

 “짚은 향토·전통·민속이라는 프레임이 강한 재료다. 나는 여기에 친밀함과 반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런데 인조짚이라는 게 있더라. 이걸 흉한 현대성이라고 해야 할지, 편리함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린다. 인조짚을 통해 그 거리감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여전히 많이 돌아다닌다.

 “집 떠난 지 20주년을 맞아 지난해를 안식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바젤·타이페이·휴스턴 등 여러 곳에서 전시를 하는 생활은 여전했다. 바쁘다는 것의 나쁜 점은 나를 원하는 곳에 가지, 내가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인도 등 내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곳 또한 다녔다. 이른바 ‘육성 여행(nurturing trip)’, 일하러 가서 다 쏟아내고 헐헐하게 빈 상태로 온 게 아니라 채워서 왔다.”

 2016년까지 전시 일정이 꽉 차 있다는 그의 올해 계획은 “지난해 얻은 양분을 갖고, 만나러 다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서울서 살며 느끼게 된 의문은 이렇다.

 “우리는 왜 소수의 성공 사례에 감탄만 하고 경각심을 갖지 않는가. 좋은 지정학적 위치, 훌륭한 저변을 갖고 있는데 난쟁이들을 만들고 있다. 이상한 사대주의를 갖고 주변에 의미부여를 못한 채 그저 신기함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전시를 통해 젊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가 부딪칠 서울살이가 주목되는 이유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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