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도덕'만으론 배가 고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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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다. 태풍이 그 여름을 데리고 북상했는지 선뜻 나타난 가을 하늘에 사람들의 마음은 괜히 설렌다. 그렇게 신선했던 신록이 그만 지겨워질 때쯤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는 얼마나 즐거운가. 자연이 선사하는 이 변화의 기대감은 공짜인데, 인간사에서 변화는 대가를 치른다. 더욱이, 어떤 고비를 넘고 있는 한국사회가 변화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은 꽤 비싼 듯하다. 반환점을 돌고 있는 참여정부의 지난 2년 반이 그런 세월이었다.

어떤 정권이든 도덕을 내세우지 않을까만 참여정부만큼 '도덕정치'에 집착해 온 정권도 드물다. 사실 '도덕정치'는 반독재투쟁의 전사들이 집권한 민주화 이행국가에서 나타나는데, 강압정치일수록 도덕에의 지향성은 강해진다. 난공불락의 기득권층을 허물고 서슬 시퍼런 권력기구를 무장해제하는 과단성은 자주 박수갈채를 받았다. 재벌과 한판 붙고 전 국토를 뒤집어 놓는 무모함에도 일말의 생동감이 빚어 나왔다. 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불안감을 눌렀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구체적 성과 없이는 한 발짝도 진전하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약속보다 그동안 들인 마음고생과 생활고를 달래줄 구체적 혜택을 생각하는 것이 반환점의 사회 심리다.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전쟁 판타지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인화된 이유가 이것이다.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 촌장에게 너무도 신중하고 어눌하게 묻는다. "별 탈 없이 촌민을 끌고 가는 비결이 뭡네까?" 그러자, 촌장이 주저 없이 답한다. "뭐를 마이 메기야 돼." 촌장은 리더십의 핵심을 알고 있다. 무엇이든 먹을 것을 줘야 하고, 먹여 주지 않는 정권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명제를 말이다. 도덕만으로는 배고프다는 것, 이제는 피부에 와닿는 무언가를 줘야 할 시점이라는 게 참여정부에 전하는 교훈이다. 줄 것이 궁색하면 도덕의 잔고는 금세 바닥난다. 아니 벌써 바닥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약속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날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참여정부가 공들인 주력사업은 대부분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비용을 요하는 것들이었다. 탄핵사태, 4대 입법안, 이념 공방이 시민들의 기(氣)를 소진시켰고, 행정도시, 기업도시, 공기업 이전 등의 국책사업에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그러는 동안 시위 전시장인 여의도와 시내 중심가에는 생계형 시위가 끊일 날이 없었다. 식당 주인들이 솥을 엎고, 양계업자가 닭을 내던졌다. 1인시위와 집단시위, 천막시위와 고공시위 등 그 유형도 다양해졌다. 돈 버는 일보다 돈 쓰는 일을 더 잘하는 정권에서 국가 재정은 대체로 적자다. '김대중 정권이 쓴 돈이 얼만데'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에는 경제 회생이라는 절박한 사유가 있었고, 경제 파탄을 가져온 김영삼 정권도 신공항과 고속철도 같은 인프라에 돈을 쓸 줄 알았다. '대기업을 위해 해줄 건 다 해줬다'면 왜 민간투자가 이 모양인가. 일인당 국민 부담금이 400만원(4인 가족 기준, 1600만원)을 돌파했다면 무엇을 돌려받았는가. 이런 마당에 올 세수(稅收) 부족액은 4조4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많이 거둬 많이 쓴 것이다. 국무위원 중 돈 아껴 쓰자고 건의하는 간 큰 사람도 없다.

참여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지난여름의 역작 '8.31 부동산 대책'이 바로 도덕정치의 결정판이다. 시장과의 싸움에 끝장이 있다는 경제학이론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참여정부는 '이제 투기가 끝났다'고 공언했다. 끝장을 보겠다는 정부의 투지에 넋 놓고 박수 치던 사람들에게 정부가 내민 것은 2~3배 늘어난 액수의 세금고지서. 박수 친 대가, 집 부자와 땅 부자에게 보란 듯 벌금을 매긴 대가치고는 너무 벅찬 고지서였다. 좋다. 이 땅의 도덕경제를 위해 고지서를 일단 접수하자. 문제는 그런 비용을 힘겹게 감수하려는 '도덕적 시민'들에게 도덕정부가 무엇을 해줬고, 해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집값과의 전쟁에서 정부가 승리하기를 제발 빈다. 9월 중에 날아올 세금고지서조차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 더 걷어서 당장 무엇을 손에 쥐여줄 것인가를 따지는 시민들에게는 가중된 납세의무가 확대경에 투사된 사물처럼 커 보였을 뿐 정부가 약속한 미래의 혜택은 미덥지 않고 불확실했다. 정권의 반환점에서 도덕정부는 '뭔가 많이 먹여야 한다'는 촌장의 조언과는 달리 '뭔가 많이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