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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이제 농민 차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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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추석, 귀향길 벌판에서 펼쳐진 노란 물결을 보았을 것이다. 몇 시간 달려간 고향마을에서 수백 개의 낟알을 달고 버거운 듯 서 있는 벼이삭을 보았을 것이다. 언제나 달려가고 싶은 그 정겨운 풍경은 농민에게는 '징한' 모습일 뿐이다. 예년과 달리 탈없이 잘 커 준 게 고맙고, 땡볕 땀을 알곡으로 맺혀준 토지의 섭리가 미덥기도 한데, 왠지 마음은 영 스산한 게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밭농사에 견주면 훨씬 쉬운 논농사에 대해 농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작파할까를 매년 망설이지만 습관적으로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는 게 농심의 현주소다. 얼마의 소득을 올려주기에 그럴까.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논 2000평(10마지기)에서 생산되는 쌀을 어림잡아 35가마 정도로 치면 80kg 가마당 16만원에 구매되므로 560만원. 여기에 정부가 주는 고정직불금 35만원을 더하면 총 600만원. 종자.비료.기타 재료비를 제외한 순소득은 500만원이다. 어떤 농민이 요즘 유행하는 재테크 컨설팅을 받았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논 2000평을 평당 5만원(아마 전국 최저가격일 것)에 팔아 1억원 목돈을 만든 다음 은행에 맡기면 이자로 연 400만원 정도의 현금수입을 올릴 수 있다. 남는 시간은 놀아도 좋은데, 심심하다면 남의 논을 부치면 된다. 이 경우 총 소득은 약 1.5배 이상 증가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최후의 순간에 토지와 작별하는 것이 농민이다. 쌀시장이 어떻든 농민들은 내년에도 모내기를 할 것이다. 이런 농심을 두고 농촌 지역 국회의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쌀 협상 비준안 시한이 연말로 바싹 다가온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협상에서 쌀시장 개방을 2014년까지 유예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대신 의무 수입 물량을 연간 소비량의 9.6%까지 늘려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주요 쌀 수출국인 미국과 중국의 입김이 컸을 것이다. 비준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내년부터 쌀시장을 전격 개방해야 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이 비준안은 쌀시장 개방보다 백번 나은 것임에도 농가 가계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국회의원 중 누구도 총대를 메지 못하고 있다. 추석 전에 통과됐다면 농심이 흉흉해져 귀향길이 무거웠을 것이고, 찬성 의원은 틀림없이 호박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비준안은 찬성, 가결은 반대'라는 농촌 지역 의원들의 어정쩡함과는 달리 민노당과 농민단체는 결사 저지 투쟁에 나섰다. 비준안보다 더 나은 협상안을 만들라는 것이다. 10년 유예가 그나마 차선책임을 모르는 바 아니고,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서 무한정 한국 농업을 보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결사항쟁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주장이다.

농업인구 7%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생산하는 한국 농업의 경쟁력은 다른 산업이 손실분을 메워줘야 할 만큼 낮다. 따라서 결사저지보다 더 시급한 것은 농업 경쟁력을 개선할 자체 혁신을 서두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게 어렵다. 가격 하락의 위험을 감지하면서 지난해와 똑같은 작물의 씨를 뿌려야 안심하는 농심의 습관이 그렇고, 1년 농사를 작파했을 경우 먹고살 길이 막막한 농업 경제의 논리가 또한 그렇다. 10년의 유예기간을 정부가 마련해 줬다면 자체 생존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것은 이제 농민의 몫이 되었다.

한국 농촌의 경쟁력은 '농사'(farming)를 '농산물 제조'(manufacturing)로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1년에 이삼모작을 하는 동남아시아, 대량의 저가 농산물로 총공세를 펴는 중국, 대규모 경작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춘 미국과 맞대결을 피할 방법은 맞춤식 제조, 주문 제조, 유기농 특화 농업 등일 것이다. 한국 농민들도 이런 점을 일찍이 간파해 촌락 고유의 브랜드를 붙인 상품들을 활발하게 내놓고 있다. 이른바 '정보화 마을'에서 초로의 농부들이 농산물 가격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언제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이런 희망의 징후들이 선진농업으로 구체화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사회학적 요소가 있다. '마을의 연대'를 이끌어줄 인재, 농촌 지도자다. 토지와 작별을 기다리는 고령의 농부들로 가득 찬 촌락에서 동네 어른들을 채근하면서 혁신의 위험 부담을 설득시킬 비교적 젊은 나이의 농부가 얼마나 있는가. 있다면, 한국 농업의 미래를 위한 외로운 싸움에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