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불씨냐 디플레 뇌관이냐 … 기로에 선 가계빚 1060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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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종로5가 의류상점이 몰려 있는 거리에 70% 이상 대폭 할인을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 보인다. 경제전문가들은 향후 5년 우리 경제의 성장이 경기 저점에 오랜 시간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김성룡 기자]

가파르게 늘고 있는 가계 빚이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은행이 25일 내놓은 ‘가계신용’ 통계에 따르면 올해 9월 가계 부채는 석 달 전과 비교해 22조원 급증했다. 잔액은 1060조3000억원으로 지난해 2분기(4~6월)부터 여섯 분기째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 중이다.

가계 빚 증가를 이끈 건 주택담보대출이다. 올 9월 은행에서 내준 주택담보대출은 3개월 전보다 11조9000억원 늘어 350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저축은행이나 협동조합 같은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에서 해준 주택담보대출은 같은 기간 1조3000억원 증가한 95조원이었다. 제2금융권 주택담보대출 증가 속도는 주춤해졌고 대신 1금융권 대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가 풀리면서 2금융권보다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1금융권으로 ‘대출 갈아타기’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은 부동산 시장에 일부 흘러 들어가며 주택 경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올 3분기 수도권 주택거래량(10만9951가구)은 2분기(10만8551가구)에 비해 1.3% 늘었다. 수도권 미분양 주택도 지난 6월 말엔 3만212가구였는데 9월엔 1만9942가구로 줄었다. 빚이 증가하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부동산 시장의 ‘군불’을 지펴 경기를 진작하려는 정부 정책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의미다. 서울 중계동 을지공인 서재필 사장은 “규제 완화 직후 전세 살던 사람들이 대출을 더 받아 집을 산 예가 많았다”고 말했다. 직접 효과뿐 아니라 간접 효과도 있었다. 이남수 신한은행 PB팀장은 “정부의 대출 규제 완화로 움츠러들었던 부동산 투자심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관망세를 보이던 수요자를 매매로 움직이게 한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의 상당액은 주택시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신병곤 한은 금융통계팀장은 “과거 통계로 추정해보면 주택담보대출 증가액 가운데 주거자금 용도로 쓰이는 건 절반에 못 미칠 것”이라며 “나머지는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기존 차입금을 상환하거나 생계용 자금을 충당하는 데 사용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집 한 채 있는 사람들이 생계비 마련을 위해 늘어난 한도만큼 돈을 더 빌리는 사례가 늘었다는 뜻이다. 이런 대출이 늘면 부채의 질(質)은 악화되고 부실화의 위험도 커진다. 집값이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면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금융감독원은 집 값에서 대출이 차지하는 비율(LTV)이 70%가 넘는 악성 주택담보대출은 올 9월 말 기준 전체의 3.8%로 12조6000억원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다. 아직은 악성 대출이 대량 부실화해도 은행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란 얘기다.

 연말엔 이사철과 맞물려 대출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지난달 한은이 기준금리를 한 차례 더 낮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올 4분기 가계부채 규모는 더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한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금리를 더 낮추자니 가계 빚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고 그렇다고 동결하자니 ‘온탕’을 기대하는 시장에 ‘냉탕’ 신호를 줄까 우려해서다. 그만큼 정부나 한은이 손쓸 수 있는 ‘골든 타임’도 줄어들고 있다.

글=조현숙·박유미·최선욱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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