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찾아간 벤처기업, 중국업체와 손잡은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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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아이카이스트 대표가 대형 수족관 화면이 나타난 멀티터치스크린을 조작하고 있다. 화면은 손가락의 정전기를 감지해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김형수 기자]

“국내 대기업에서는 비상식적인 공급가격만 강요하는 실무자밖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게 불가능했지요.”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의 모델’로 극찬한 벤처기업 아이카이스트가 국내 대기업들의 외면 끝에 중국 5대 전자업체인 TCL과 손을 잡았다. 아이카이스트는 20일 중국 선전(深?)의 TCL 본사에서 TV용 터치스크린 모듈과 스마트폰용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를 공급하는 협약을 했다고 밝혔다. 부품 공급 규모는 연간 5000억원대이며, 최소 5년을 보장받았다. 두 회사는 부품공급 계약 외에도 신제품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아이카이스트는 2011년 대전에서 설립된 신생 기업이지만 실력은 수준급이다. 세계 최초로 유리 대신 플라스틱을 이용한 플렉서블(휘는) 터치패널을 개발하는 등 핵심 정보기술(IT)을 인정받고 있다. KAIST가 지분의 49%를 출자한 KAIST의 자회사이기도 하다. 지난해 터키·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 6개국에 터치패널 기술을 이용한 스마트스쿨 완제품 5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국내에서도 최근까지 세종시를 비롯한 전국 415개 초·중·고교에 스마트스쿨 장비를 납품했다. 이 같은 성과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정홍원 국무총리,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 등이 아이카이스트의 대전 본사를 잇따라 방문했다. 이 회사의 최대주주 겸 최고경영자(CEO)는 KAIST 학부(산업디자인학과) 출신의 김성진씨로, 올해 만 30세의 청년 벤처인이다. <본지 7월14일자 b2면 참조>

 김 대표는 한국이 아닌 중국 정보기술(IT) 기업과 손잡은 이유로 한국 대기업들의 폐습을 지적했다. 그는“그동안 만난 국내 대기업 실무자들은 ‘신생기업을 키워주는 거니 우리에게만 독점 공금해야 한다’거나, 100만원대 65인치 터치스크린 모듈을 30만원대에 납품하라고 요구했다”고 털어놨다.

 중국 TCL은 달랐다. 아이카이스트 측이 올 7월 TCL의 구매실무자에게 e메일로 부품공급 의향을 밝히자, 이 같은 내용이 곧바로 TCL의 최고위층까지 보고됐다. 한 달 뒤 궈아이핑(郭愛平) TCL 사장이 5명의 실무자를 대동하고 직접 한국 아이카이스트를 찾아 실사와 협의를 진행했다. 터치스크린 모듈 공급가도 제값인 100만원대를 보장했다. 20일 중국 선전에서 열린 부품 공급 협약식까지 걸린 시간은 단 3개월에 불과했다. TCL은 그간 아이카이스트 전담 특별팀을 신설하고, 임원들을 수차례 대전으로 보내는 등 공을 들여왔다.

 김 대표는 “TCL이 SK 등 한국 대기업과 협약을 맺은 적은 있지만 국내 중소기업과 손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기술력만 입증받으면 얼마든지 해외 기업과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라고 말했다.

 중국의 대표적 가전·IT기업 중 하나인 TCL은 TV를 주력으로 하고 있으며, 프랑스 알카텔을 인수해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급격히 높이고 있다. 지난해 매출 10조원을 올렸으며, 중국 본사와 세계 40개국 해외법인에 총 6만여 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TCL은 올 3분기 세계 평판TV 시장 점유율 5%로 세계 5위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25.5%)이며, 다음으로 LG전자(14.5%)-소니(7.5%)-하이센스(6.6%) 순이다. 올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가전박람회(IFA 2014)에서는 세계 최초로 110인치 커브드 초고화질(UHD)TV와 양자점(퀀텀닷)TV를 공개해 세계 TV업계를 놀라게 했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TCL이 아이카이스트 기술을 등에 업고 터치스크린 장착 TV와 플렉서블 스마트폰 제품을 내놓으면 삼성·LG와 같은 국내 기업에 한층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최준호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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