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선 거의 실명예금제 실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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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제2의 8·3조치라고 불리는 7·3조치를 통해 모든 예금에 대해 실명제를 실시하게됐다.
외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선진국의 경우 거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실명예금제도를 실시해 왔다.
여태껏 무기명 또는 가명 예금 제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스위스·싱가포르 정도다.
비밀예금의 천국이라는 스위스까지도 최근 들어서는 일정액 (23만5천 달러· 1억8천 만원) 이상은 무기명 구좌개설을 금지하기에 이르렀고 일본은 84년부터 그린카드 제를 실시하게 됨에 따라 이자소득종합과세와 실명예금제도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실명화 계획은 이들에 비해서도 매우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여건이나 금융관습 면에서 오히려 불비점이 더 많다.
일본의 경우 오는 84년부터 그린카드 제를 실시하겠다는 법안을 지난 80년에 통과시켜놓고서도 최근 들어서는 여당인 자민당일부에서 조차 백지화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을 봐도 예금의 실명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의 그린카드제도가 금융자산의 이자소득에 대한 세제상의 특혜를 바로 잡겠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7·3조치와 맥을 같이한다.
즉 지금까지 분리과세 해온 일부예금을 앞으로는 모두 종합과세 하겠다는 것이며 다만 세금을 일체 안 물리고 있는 일정액 이하의 소액예금의 경우는 그대로 존속시키되 그린카드를 소지한 사람에게만 면세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저축장려를 위해 최고 1천4백만엔 이하의 소형저축이나 우편예금·주식투자 등에는 일체 세금을 물리지 않고 있는데 이를 악용해서 다른 사람이름이나 가명으로 분산예금 하는 것이 큰 골칫거리로 되어왔다.
그린카드를 발부하게될 경우 소액예금을 통한 탈세행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세의 형평을 기하겠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의도를 같이하지만 우리처럼 사채의 원천을 모조리 노출시키기 위해 모든 금융자산의 실명화를 시도하겠다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그린카드제도는 면세혜택을 받으려는 소액예금자를 대상으로 하는 매우 부분적인 기명화인 것이며 이자소득에 대해서 세금을 물겠다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무관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사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일본금융 시장이니까 우리와는 형편이 다르다.
무기명예금은 이미 금지되어 있고 은행별로 최고한도를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다만 여러 은행구좌를 이용할 경우 무한정으로 면세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악용의 소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린 카드 제 실시를 통해 이를 종합체크 하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인데도 일반의 충격은 대단했고 지금까지도 시비가 계속되고있다.
세금도피자금이 금이나 골동품·부동산 쪽에 몰리고 있고 자산의 해외유출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부 돈 많은 사람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왜 대다수의 일반시민들에게 그린카드 제를 실시해서 번거롭게 만드느냐는 불만도 만만치 않다.
이미 관계법이 의회에서 통과됐고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실시시기를 4년 뒤로 늦춰 놓았는데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회적이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처럼 진통을 겪고있는 것이다.
한편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금융관습상 무기명이나 가명예금은 전혀 발을 붙일 수 없는 여건이다. 예컨대 오랜 단골고객이라도 현찰을 많이 찾아가는 경우에는 자금 사용 처를 일일이 은행측에 밝혀야 은행이 인출에 응하는 것이 관례다.
한마디로 이처럼 철저한 가명 예금 제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배경은 모든 사람들의 소득 원천부터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원천이 명백한 수입으로 저축을 하는 것이니까 구태여 무기명 예금을 할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서는 이것이 신용질서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예금자 비밀보호 원칙이라는 것도 기명 제냐 무기명제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은행과 예금자와의 철저한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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