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일본 닮아가는데 … 남의 일 보듯 위기 불감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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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부사장

1995년 6월 21일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에 비상이 걸렸다. 그해 1분기 경제성장률(GDP)이 0.1%로 곤두박질했기 때문이다. 대장상·통산상·경제기획청장이 머리를 맞댔고 엿새 후 대책을 쏟아냈다. 2조 엔 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 주식거래세 감면, 공공사업 지출 조기 집행, 중소·벤처기업 창업 대출 지원 등이었다. 경기가 반짝 살아나자 96년 집권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정부는 ‘냉탕’정책으로 돌아섰다. 97년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올리고 강력한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썼다. 겨우 고개를 들던 경기 회복의 싹은 잘려 버렸다. 뒤이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정부는 사상 최대 부양책을 들고 나왔다. 1년8개월 재임 동안 무려 42조 엔의 돈을 퍼부었다. 그러나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다. 경제정책이 이처럼 냉탕·온탕을 오가는 사이 정치권은 파벌싸움에 몰두했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89년 이후 2000년까지 14년 동안 총리가 10명이나 바뀌었다.

 경제정책 헛발질과 정치권의 리더십 실종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국민도 매너리즘에 빠져들었다. 사이토 세이치로(齋藤精一郞) 릿쿄대 교수는 99년 『일본 경제 왜 무너졌나』라는 책에서 이를 ‘극장화의 함정’으로 진단했다. 허구한 날 반복되는 정쟁, 정권마다 쏟아내는 경제대책에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에 무뎌졌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를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남의 일처럼 여기게 됐다는 얘기다. 사이토 교수는 “90년대 일본인은 극장화의 함정에 빠져 불안과 위기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정치권도 정쟁에만 몰두했을 뿐 구태의연한 전시성 대책으로 일관해 신뢰를 잃었다. 국가 전체가 위기 불감증에 빠진 결과가 잃어버린 2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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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국내에서도 일본이 밟은 전철을 되풀이할 조짐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홍성국(리서치센터장) KDB대우증권 부사장은 29일 “현재 한국 상황이 섬뜩할 정도로 일본과 비슷하다”며 “90년대 ‘일본 극장’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끊임없이 정책을 발표하는 관료와 정치인이 배우이고 국민은 이를 남의 일처럼 보는 관객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 경제성적표도 엔고 거품이 붕괴한 직후인 90년대 일본을 빼닮았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4저 현상’이 뚜렷하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2011년 11월 4.2%를 기록한 뒤 계속 떨어져 2012년 11월부터 22개월간 1%대를 유지하고 있다. 민간소비증가율은 2009년 3분기 이후 0~1%대를 맴돌고 있고 설비투자증가율도 비슷하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부터 4분기 연속 0%대에 머물고 있다. 2000년대 초반 4~5%에 달했던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인 2%로 주저앉았다. 경상수지가 올 9월까지 31개월째 흑자 행진을 한 게 그나마 위안이지만 이마저 마냥 기뻐하긴 이르다. 수출보다 수입 하락 폭이 더 커서 생기는 ‘불황형 흑자’ 양상이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강중구 연구위원은 “일본도 90년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겪으면서 경상흑자가 누적됐다”며 “불어난 흑자가 엔화 값을 올려 디플레이션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말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 후 네 차례에 걸쳐 굵직한 경기부양책을 쏟아냈다. 그러나 반짝하던 부동산·주식시장의 기대감은 벌써 꺾일 조짐이다.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만 쌓여 가고 있다. 홍 부사장은 “한국이 세계 14위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지난 3~4년 사이 성장이 멈춘 갈등공화국이 됐다”며 “한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이 일본 같은 복합 불황에 빠져들고 있는데도 이를 내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극장화의 함정에 걸려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요즘 같은 위기는 단군 이래 처음 나타나는 현상인데 긴장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며 “위기를 인식하는 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창규·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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