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말 꺼내기도 힘든 온건파 … '강경파 포비아' 에 빠진 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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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고작 ‘유족들이 동의하지 않는 특별법은 없다’가 130명 제1야당의 당론인가. 국민의 공감이 뭔지부터 생각하자. 국민의 평균 생각과 우리 당 적극 지지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24일 오후 10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예결위 회의장에선 새정치민주연합의 의원총회가 한창이었다. 회의 막판 강경 일변도의 분위기를 뚫고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정보통신부 차관을 지낸 변재일 의원이었다. 4성 장군 출신 백군기 의원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나는 내일부터 국감을 하려고 나왔다. 지금은 (투쟁만 할) 때가 아니다. 내 주위엔 ‘세월호(논쟁을) 빨리 정리하라’는 목소리가 95%다.”

 새정치연합은 이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의원총회를 열었다. 장장 7시간30분간이었다. 모두 37명이 발언을 했다. 하지만 변 의원과 백 의원 같은 온건론은 나오자마자 사그라졌다. 곧바로 봇물처럼 쏟아지는 강경론 때문이다.

 “해가 뜨거울 때 세게 쳐야지! 130명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휴대전화 끊고 일주일만 단식했으면 좋겠다” “유가족의 뜻대로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회의장을 압도했다.

 이런 의총의 답은 뻔했다. 자정 직전 박범계 원내대변인은 “3자협의체 구성 제안을 거절한 새누리당을 강력 규탄한다. 원내대표단을 중심으로 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브리핑에는 강경론에 맞섰던 소수 의견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변 의원은 의총이 끝난 뒤 “통렬하게 반성하고 유족에 대한 애절함을 표현해야지, 점거나 농성은 안 된다. 강경파에 지도부가 끌려다니는 모양새”라고 안타까워했다. 백 의원도 “지금 우리의 행동이 국민의 목소리와 맞지 않다. 투쟁, 농성 이런 모습만 부각돼 국민에게 왜곡된 인식만 전달될 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의총은 늘 이런 식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는 설 땅을 잃고, 강경파의 매도 대상이 된다. 한 의원은 “강경파에게 무슨 욕을 먹을지 몰라 ‘의총포비아(의원총회를 무서워하는 증세)’를 겪는 의원들이 꽤 된다”고 귀띔했다.

 경쟁하듯 쏟아내는 강경론 속에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모습은 과거 운동권 대학생들의 집회를 닮았다. 그때 대학생들은 집회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의원들에겐 입법권이란 큰 무기가 있는데도 그걸 팽개치고 있다.

 이런 선명성 경쟁은 의원들이 목숨 걸고 매달리는 ‘공천’과도 무관치 않다. 2012년 4·11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는 “당선 가능성보다 ‘정체성’을 강조하겠다”고 못박았다. 대안 제시 능력이나 비전보다는 당성(黨性)을 중시하겠다는 거다. 그 결과 관료 출신이나 중진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했고, 지금의 새정치연합이 됐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 의총에서 당론에 맞서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용감한 의원들은 점점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새정치연합은 이런 의총을 31일까지 매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그나마 몇 안 되는 온건파 없이 강경파들만 모일 게 뻔한 의원총회를….

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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