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없다 … 국내 백화점서 외국산에 밀려 방 빼는 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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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션의 도시 미국 뉴욕. 이 중에서도 5번가가 최고의 패션 중심지다. 명품이 아니면 발 붙이기 어렵다는 이곳에 지난달 17일 스웨덴의 중저가 브랜드 ‘H&M’이 둥지를 틀었다. 4개 층을 통으로 쓰는 대형 매장(5295㎡)이다. 뉴욕 패션계가 외면할 수 없는 한 방도 준비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티스트’로 불리는 제프 쿤스가 매장을 디자인했다. 옷만이 아니라 최고의 매장도 보러 오라는 브랜드 전략이다.

 #2. 지난해 9월 신세계 본점이 새 단장을 했다. 이때 코오롱의 중저가 여성복 브랜드 ‘쿠아’는 짐을 쌌다. 쉬즈미스·시슬리 같은 국산 브랜드도 매장을 빼야 했다. 이 자리는 해외 브랜드가 차지했다. 한국이 섬유 강국이라지만 명품이 되기엔 역사와 명성이 턱없이 달린다. 중저가 제품에서도 밀린다. 한 유명 브랜드의 한국지사장은 “한국은 겉모양은 흉내 내지만 수요를 예측해 발 빠르게 새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중저가 브랜드의 본질은 익히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주태진 한국패션산업연구원 본부장은 “섬유 수출이 잘될 때 새 제품과 브랜드를 개발해 미래를 준비했어야 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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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제조업의 성장은 세계가 부러워한다. 그러나 한국 제조업은 여전히 ‘이름’이 없다. 삼성전자·현대차 정도의 브랜드를 빼면 ‘세계적’이란 수식어를 달 수 있는 게 몇 없다. 100년 기업인 두산그룹의 박용만 회장은 “해외에 나갔더니 두산이란 브랜드를 아는 사람이 너무 없더라”고 말했다. 두산이 세계적 골프대회 ‘디 오픈’을 후원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 주자도 위태위태하다. 현대·기아차는 세계 자동차 판매에선 5년째 5위를 지키고 있다. 품질 만족도 평가에서도 상위권에 오른다. 그러나 브랜드 가치를 조사하는 회사인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는 43위, 기아차는 83위다. 많이 올랐다는 게 이 정도다. 일본 도요타(10위),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11위)와 BMW(12위)와 격차가 크다.

 서울대 이경묵(경영대) 교수는 “삼성전자는 경쟁사인 애플에는 브랜드 충성도 면에서 밀리고, 가격 경쟁력은 중국 전자회사들에 밀리고 있다”며 “중국 중저가 폰의 성장이 애플보다 삼성전자에 더 큰 부담인 것도 바로 브랜드 파워의 차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우창화 경상대 산업협력단 교수는 “브랜드가 없다는 것은 언제든지 외면당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기업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국격도 따라줘야 한다. 제일기획 관계자는 “국가 브랜드가 명품이 돼야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제품도 명품 반열에 오른다. 프랑스·이탈리아에 명품이 많은 것은 국격이 제품의 위상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 점유율 1위라는 화장을 하고 있지만 부끄러운 민낯을 하고 있는 분야도 많다. 삼성전자 스마트폰도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운영체제(OS)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달 1일 MS가 삼성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낸 특허사용료 관련 소송도 OS에 대한 것이다. 삼성의 연간 스마트폰 판매량만 3억 개가 넘는 업체이기 때문에 MS에 내야 할 연간 로열티만 30억 달러(약 3조1140억원)에 이른다. 재주는 삼성전자가 부리고 MS은 앉아서 돈을 챙겨가는 셈이다.

 빈 껍데기 제조업의 성적표는 궁색하다. 많이는 파는데 남는 게 없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제조업의 2010~2012년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10.6%로 36개 주요국(평균 8.2%) 중 8위였다. 그러나 얼마나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영업이익률은 4.9%로 겨우 중간(18위)을 차지했다. 또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산 수출품의 부가가치를 100으로 했을 때 한국에 남는 것은 60% 수준이다. 반면 중국은 72%, 일본은 83%가 국내에 남는다. 주원 현경연 수석연구위원은 “수출이 늘어도 국내 소득이 크게 늘지 않는 이유가 제조업의 핵심 기술력이 낮기 때문”이라며 “브랜드 가치 제고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김영훈·이소아·김현예·박미소·이현택·김영민 기자 filic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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