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프란치스코] "한국 교회, 성공·권력의 세속적 유혹 물리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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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주교단을 만나기 위해 서울 중곡동 천주교중앙협의회를 찾았다. 교황이 탄 차량이 도착하자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장련성 인턴기자]
교황이 주교단을 만난 뒤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환영 나온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김형수 기자·장련성 인턴기자]

빡빡한 일정이었다.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환영행사를 마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곧바로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 건물인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이동했다. 청와대에서 10㎞ 거리에 위치한다. 주교회의 건물은 협소해 의자를 다닥다닥 놓아야할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방한준비위원회 측은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실제 주교들이 일하는 곳을 찾아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주교들의 일상, 주교들의 삶을 느끼고자 하는 교황의 뜻이었다.

 오후 5시51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 주교회의 건물 안 소성당으로 들어섰다. 배석자들은 “와~아!” 하고 박수를 쳤다. 교황은 십자가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은 채 1분가량 기도를 했다.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고 주문했다.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다. 회개와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1754~85·한국 천주교의 선구자)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다”며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 그걸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화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은 곤란하다고 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거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건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어서 교황은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특히 난민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 함께할 것을 요청했다. 그게 바로 ‘희망의 지킴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국 교회는 성공과 권력의 세속적 기준에 대한 유혹을 물리쳐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이다(고린도 1서 1장 17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기억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를 향해 이끌어 간다”고 말했다.

 연설을 마친 프란치스코 교황은 50회 정도 북한을 방문했던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함제도(81) 신부와 악수하며 “북한의 결핵 환자들을 위해 일하느라 수고했다”고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함 신부는 영어로 “웰컴”이라고 답했다.

주교회의 직원들은 경호 문제로 교황에게 손을 내밀지 말 것을 미리 당부받았다. 다들 눈치를 보는데 한 직원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교황이 오히려 한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었고 교황은 일일이 악수를 했다. 교황은 검은색 쏘울에 탔다가 모여든 700여 명의 주민이 환호하자 떠나지 않고 한참 머물렀다. 대만에서 활동 중인 타요네라 신부는 “교황님을 만나 행복하고 흥분된다 ”고 말했다.

백성호·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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