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성식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병원에는 손자의 춤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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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선임기자

현대 의료는 장비 의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채만 한 양성자치료기, 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 대형 진단기기에다 수술용 로봇까지 일반화됐다. 청진기 진찰 장면이 점점 낯설어진다. 의사가 환자 눈을 맞추는 대신 검사·진료 정보가 담긴 모니터를 본다. 대화시간이 30초를 넘기지 않을 때가 많다. 기계화된 진료다. 환자는 장비를 찾아 병원으로 가야 한다.

 병원에서 병을 얻을 때가 있다. 지난해 한 식물인간 환자는 집에서 요양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간 네 차례 폐렴에 걸렸다. 간병하던 아내가 몸져 누운 사이에 입원했다가 일주일 만에 숨진 환자도 있다. 병원에서 수퍼박테리아 같은 내성(耐性) 균에 감염되는 사람이 연간 수천 명에 달한다.

 집에서 진료받을 길이 없을까. 서울백병원에서 권인순(62·노인의학) 교수는 몇 안 남은 왕진 의사다.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못 오는 환자를 찾아간다. 노인과 수다 떠는 걸 즐긴다. 살림살이, 부인의 가출 등 환자의 형편을 훤히 꿰고 있다. 환자와 보호자는 이런 권 교수에게 모든 걸 내보이고 맡긴다. 무한 신뢰다.

 2일 권 교수가 왕진한 서울 퇴계로의 중증치매 환자인 이모(90) 할머니 머리맡에는 8년 전 세상을 뜬 남편의 사진과 시부모 초상화가 걸려 있다. 창가에는 난 화분이 가득하다. 고교 1년생 손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할머니”라면서 수시로 춤을 추고 입을 맞춘다. 할머니는 5년 동안 와상(臥牀) 상태로 집에 있다. 권 교수가 수시로 왕진해서 환자 상태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권 교수는 “할머니가 병원에 있었다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죽음의 질은 주요 40개국 중 32위다(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 2010년). 이는 낮은 가정 사망률(2012년 19%)과 무관하지 않다. 왕진이 활성화되면 선진국(스웨덴 51%, 네덜란드 31%)처럼 될 수 있다. 한국 의료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질은 아직 멀었다. 병원 입장에서는 시간 들여 왕진하느니 오는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보는 게 낫다.

 만성질환 환자와 노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병원 중심의 진료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 할머니에게 50년 살아온 집만한 데가 없을 게다. 아무리 좋은 병원이라고 해도 거긴 ‘손자의 춤’이 없다. 왕진은 환자의 행복지수를 높인다. 수가를 신설하되 환자 부담률은 낮추는 식으로 상을 차려주면 병원과 의사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신성식 논설위원 겸 복지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