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막전 '뇌파 시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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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하반신 마비 환자 줄리아노 핀토가 12일 뇌파를 이용해 시축하고 있다. 방송사들은 이 장면 대신 경기장 전체 화면을 내보내 빈축을 샀다. [사진 유튜브]

12일 오후 4시(현지시간) 브라질 아레나 데 상파울루 경기장에서 시축으로 월드컵 시작을 처음 알린 사람은 하반신 마비 환자 줄리아노 핀토(29)다. 그는 찌를 듯한 함성 속에서도 로봇 발을 조심스럽게 뒤로 젖히더니 축구공을 앞으로 톡 차는 데 성공했다. 뇌파를 감지하는 헬멧을 이용해 ‘왼쪽 발을 뒤로’ ‘공을 차’라는 명령을 내렸다. 등에 달린 컴퓨터가 뇌파가 전한 명령을 로봇 다리로 전달했다. 일반인에게는 단순한 공차기에 불과했지만 핀토와 같은 척추 손상 장애인들에게는 미래를 바꾼 시축이었다. 핀토는 주먹을 치켜들고 환호를 질렀다.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에게 새 삶을 안겨준 시축 프로젝트 ‘다시 걸을 수 있다(Walk Again)’는 미겔 니콜레리스(53) 미국 듀크대 교수를 중심으로 25개국 연구진 150여 명이 준비한 행사다. 브라질 출신의 신경과학자 니콜레리스 교수는 2008년 뇌파를 이용해 미국의 원숭이가 지구 반대편인 일본의 연구실에 있는 로봇을 조종하도록 해 유명세를 치렀다. 시축은 지난해 1월 브라질 정부가 1500만 달러(약 153억원)를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사고로 척추가 마비됐거나 근육이 위축되는 병을 앓는 20~35세 환자 8명이 시축 후보로 꼽혔다.

 올해는 인간의 뇌파를 발견한 지 90주년. 1924년 독일의 신경과학자 한스 버거가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의 전기신호를 처음으로 잡아냈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업들도 뇌파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대 연구진과 함께 뇌파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고, 일본 도요타는 뇌파로 기어를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를 선보였다.

 스위스 정부는 뇌파와 로봇 기술을 이용한 올림픽 ‘사이배슬론(Cybathlon)’을 2016년 개최할 예정이다. ▶뇌파를 이용한 컴퓨터 자동차 게임 ▶신체 전기 자극을 이용한 자전거 경주 ▶전기 자극 휠체어 경주 ▶로봇 의족 달리기 ▶로봇 의수를 이용한 비디오 게임 ▶로봇 슈트로 걷기 등 6가지 종목이 펼쳐진다. 이성환 고려대 뇌공학과 교수는 “장애인과 일반인이 동시에 참여하는 세계 최초의 올림픽이 될 것”이라며 “뇌파시대를 맞아 한국 정부도 주관 부서를 정하고 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뇌파기술 확산이 기대보다 더딜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뇌와 뇌파 감지장치 사이에 두개골이라는 장벽이 있어 신호가 크게 약해지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뇌파 감지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장의 문 밖에서 바이올린 소리를 잡아내는 것만큼 어렵다. 아직까지는 전등을 켜거나 끄는 정도의 단순한 명령을 파악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번 월드컵 시축 행사가 동작을 미리 설정해 놓은 로봇이 움직이는 가짜 연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뒷말도 무성하다.

 니콜레리스 교수 연구팀은 이에 대해 “눈의 깜빡임, 머리의 움직임과 같은 신체의 다른 보조 신호를 함께 활용해 뇌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KAIST 조성호 전산학 교수 연구팀도 뇌파와 함께 눈의 움직임을 활용해 무인기를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무인기를 들어올리는 단순한 동작은 뇌파로,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세밀한 동작은 눈의 움직임을 이용했다. 조 교수는 “뇌파로만 기계를 움직이려면 집중한 상태를 유지해야 해 일반인에게 적용하기 어렵다”며 “인체의 다른 신호와 결합한 다음 이를 단순화시켜 상용화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안경과 시계에 첨단 기술을 결합한 ‘입는 스마트 기기’가 보편화하는 만큼 뇌파 활용이 익숙한 생활도 멀지 않았다고 내다봤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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