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원 입모아 '푸른 코러스' … 감성경영 1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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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푸른저축은행 본점에서 만난 구혜원 회장. 그는 전시 중인 아트주얼리를 가리키며 “틀 안에 갇혀 사는 나를 달래주는 통로”라고 했다. [변선구 기자]

1993년 서울의 한 상호신용금고 영업장 구석에 피아노 한 대가 들어왔다. 창구에 기대 선 직원들이 서투른 솜씨로 화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첫 공연은 회사 유니폼을 입은 채로였다. 푸른저축은행의 사내 합창단인 ‘푸른코러스’의 창단 시절 얘기다. 당시 피아노 반주를 해주던 이가 구혜원(55) 푸른그룹 회장 겸 푸른저축은행 대표이사다.

 사내 합창단은 구 회장의 남편이었던 고(故) 주진규 전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은 UC버클리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딴 학구파였지만 대학 시절 성악과 수업을 청강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남편 목소리가 참 좋았거든요. 바리톤에 딱 어울리는 음색이었어요.” 그렇게 전 사원들이 참여하는 합창단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평사원들은 한 번씩은 합창단을 거쳐가야 한다. 합창 연습을 위해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각 지점의 직원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공동체 의식’이 자리 잡았다.

 구 회장은 99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같은 해 경영 일선에 나섰다. 그는 고(故)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외동딸로 사조그룹 창업주인 고(故) 주인용 회장의 차남인 주 전 회장과 결혼했다. 사고 당시 아들이 고등학생, 두 딸이 중학생·초등학생이었다. 그는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란 존재는 강한 법인지, 제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000년대 초 대형 금고들이 연이어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위기가 왔다. 구 회장은 사재를 들여 10년짜리 후순위 예금에 가입해 수신을 늘렸다. 아버지인 구 전 명예회장이 딸을 위해 푸른저축은행의 주식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주가가 높을 때 사셔서 후에 주가가 떨어지니 웃으시며 너 때문에 손해가 많다며 투덜거리셨다”고 전했다.

 뜻하지 않게 경영에 나섰지만 그는 “성격이 꼼꼼하고 철저한 편이라 삭막한 숫자와 싸우고 매사 정확해야만 하는 금융업에 잘 맞는 것 같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어렸을 때부터 튀는 게 싫어서 학교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제 사전에 지각·결석 같은 것도 없었어요. 답답한 ‘범생이’ 같은 거죠.(웃음)”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뉴욕대와 이화여대에서 교육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음악감상이나 미술관람을 통해 “일정한 틀 안에 갇혀 고루하고 답답한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페라나 연극도 즐기는데 그는 “VIP석 바로 옆이나 뒤에 붙어 있는 R석을 사는 ‘여우 짓’도 한다”고 표현했다. 할인에 대비해 철 지난 공연 티켓도 모아둔다. 지인들이 그를 ‘짠순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실제로 이날 구 회장은 이태원·동대문에서 산 재킷과 바지를 입고 사진기자 앞에 섰다. 들고 나온 가방은 홍대 앞을 지나다 구입했다.

 20년을 함께해 온 합창단은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다. 합창단은 24일 오후 6시30분 여의도 KBS홀에서 ‘창단 20주년 기념 연주회’를 무료로 연다. 구 회장은 “직원 자녀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에서 마치 한가족처럼 생활해 온 느낌이 든다”며 “저축은행 업계 이미지가 실추된 시점에 가족들에게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4월부터 같은 건물에 구 회장의 장남이 입사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이 연습 중간에 입사하는 바람에 올해 연주회는 못 서게 됐지만 내년 정기 연주회에는 우리 아들도 노래를 부를 겁니다.(웃음)”

글=위문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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