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3월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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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심사평

잇고 끊는 가락의 묘미
완급조절 솜씨 뛰어나

봄꽃 소식은 한반도의 위도를 선명히 보여준다. 내가 사는 통영엔 매화는 거의 지고 지금은 진달래 개나리가 한창이다. 며칠 후면 벚꽃이며 배꽃이 필 것이다. 남도에서부터 피어난 꽃들이 어울 더울 북상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조도 그렇게 어깨춤 추며 온 산하를 물들였으면 좋겠다. 이렇듯 메기고, 풀고 늘이며 종장에 이르러 제대로 된 결구를 맺는, 그래서 유장하고 때론 굽이치는 가락을 가진 시인을 그리며 응모작들을 읽었다.

 이달의 장원으로 이병철의 ‘내 마음의 간헐천’을 뽑는다. 이 작품은 단수이면서도 높낮이가 있고, 잇고 끊는 가락의 묘미가 있다. 급박한 걸음으로 여울을 이루다가 모래톱에 이르러 숨을 고르는 솜씨에 점수를 주고 싶다. 마르고 또 흐르는 마음의 간헐천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래 소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한 진한 갈구가 느껴진다. 요즘 신선함을 쫓다 시를 놓치는 예를 많이 보았다. 이 작품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아 신뢰가 간다.

 차상으로 정도훈의 ‘기둥의 계보’를 선한다. 아버지의 탈상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 운명처럼 눈에 묻혀 작별은 쉽지 않다. 오던 봄도 이런 날에는 저만치 뒤로 물러서고 만다. 갑작스레 마주친 상황을 네 수의 연시조를 풀어내는 힘이 좋다. 마지막 수 종장인 ‘긴 겨울 밟고 오르는 관절들’같은 표현을 보면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습작을 많이 한 흔적은 묻어나지만 아직은 음보를 자유로이 다스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차하엔 나동광의 ‘물 위의 그림자’이다. 안정된 보법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삶에 있어 무난함은 적절한 처신이겠지만 시에서는 감동이 결여될 우려가 있다. 시적 대상이 좀 더 구체적이고 표현이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면 훨씬 나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외에도 오서윤·이기동·이종문 씨의 작품도 눈길을 끌었지만 선에 들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음을 밝혀둔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오승철·이달균(대표집필 이달균)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초대시조 안경  이우걸

껴도 희미하고 안 껴도 희미하다

초점이 너무 많아

초점잡기 어려운 세상

차라리 눈감고 보면

더 선명한

얼굴이 있다.

◆이우걸=1946년 경남 창녕 출생.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 외 다수. 평론집 『현대시조의 쟁점』 출간. 중앙시조대상·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현대 시문학 장르로서 시조의 미학적 자질은 3장 형식과 종장에서의 차원 변화를 들 수 있다. 종장이 지닌 전환의 미학은 시조 문학의 예술적 세련성을 드높이는 핵심 자질이다. 단시조든 사설시조의 장시조든 예외일 수 없다. 조선 초기의 문학적 은유 방식이든 후기의 창(唱)의 방식이든 독자 또는 청자 내면의 서정세계를 자극하는 것은 결국 종장의 비약이나 확대, 역설, 단념, 반전 등의 미학이다. 이러한 전환의 원리야말로 시조를 시조답게 하고 자유시와 다른 맛을 내는 최대 변별요소다.

 볼 수 있는 축복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시력이 나빠 잘 보이지 않던 것들도 안경을 쓰면 또렷하게 보인다. 침침하던 마음도 환히 밝아진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안경을 껴도 희미하고 안 껴도 희미하다. 안경으론 명암을 구분할 수 없고, 보이는 실체가 진실만은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리라. 안경을 벗고 눈을 감아야만 선명히 보이는 ‘초점잡기 어려운’ 세상. ‘차라리’란 반전과 역설은 그래서 더욱 공감을 더한다. 이러한 현실비판의 은유와 종장이 지닌 전환의 미학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시조의 세계를 펼친다.

권갑하(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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