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감독 이경손씨(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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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씨가 그토록 열망하던 외국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태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은 현 부인과의「로맨스」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부인「부라영」여사는 당시 중국국민당 간부가 경영하는「태문 매일신문」의 편집부장 겸 사장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이 신문은 태국에서 발간되던 20여종의 일간지 중 가장 반공·배일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과 동맹의 관계에 있던 태국정부로부터 갖가지 탄압을 받아 재정형편도 퍽 어려웠다.

<헌신적 생활태도 가진 여자>
그래서「부라영」여사는 사장 집 가계에서부터 사원의 급료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할 처지여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이따금 필화사건이 생기면 법정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씨는「부라영」여사의 이같이 헌신적인 생활태도와 자상한 마음씨에서 실로 오랜만에 고국에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녀 역시 화교신문에 희곡을 기고하고 있던 이씨를 정답게 대해 주었다. 두 사람간의 애정은 어학공부를 매개로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는 신문사에 놀러 온 이씨에게『왜 태국 말을 배우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태국에 심오한 문학작품이 없는 데다 그의 태국체재 목적이 일시적인 피난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별다른 태국어 습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더우기 화교가 많은「방콕」에서는 중국말만 할 줄 알면 생활에 불편이 별로 없었으며「부라영」여사와의 대화는 영어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씨는 이런 속셈을 말하지 않고 그녀와 사귈 수 있는 절호의「찬스」를 붙잡았다. 『기회가 있으면 배우고 싶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는 또 여자에게「룸펜」신세를 보이기 싫어 다시 화교중학의 영어교사로 취직도 했다.
이때부터 23개월 동안 두 사람은 매일 하오5시 화교중학의 텅빈 교실에 마주앉아「애정이 있는 어학수업을 계속했다. 실제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어학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아뭏든 이씨는 수업을 통해 매일 하오7시면「부라영」여사의 집에서 기다리는「귀한 손님」이 되었다.
태국의 양가처녀는 지금 세상에도 해가 지고 나면 남자가 놀러 가자고 함부로 끌고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씨는 매일 하오7시가 되면 그녀의 집을 찾아가 그녀의 어머니 앞에 석자의 거리를 두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거나「데이트」를 신청해야만 했다.
태국여성의 매력은 아침 저녁, 두 차례에 걸쳐 하는 목욕에 있다. 아침에도 물론 목욕을 하고 분을 바르지만 오후6시에 하는 목욕은 시간도 훨씬 더 오래 걸리고 화장도 더 짙고 향기롭다.
머리에 꽃을 꽂고 선이 아름다운 태국식「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와 내방객을 맞는 처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매일「애정 있는 어학수업」>
이씨는 이런 식의「데이트」를 3년 동안 비가 오나 천둥이 치는 날도 빠지지 않고 계속한 끝에 장모로부터 결혼응낙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씨의 나이 36세, 부인은 26세였다.
화교중학교장이 주례를 서기로 하고 내일이면 식을 올릴 판국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방콕」에서 제일 큰 태국어 신문이 1면「톱」기사로『반일신문 편집부장이 일인하고 결혼한다』는 내용을 보도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부라영」여사가 일하던 신문을 미워한 친일단체가 중상 모략한 사건으로 이씨는 변명 한마디 못하고 일본인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훼방꾼들의 모략에도 불구,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씨는 달콤한 신혼살림을「방콕」시내에 차렸다. 특별히 벌어 놓은 돈이 없는 이씨로서는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이 전부 살림밑천이었다. 다행히 친구가 많아 축의금은 살림도구를 다 사고도 몇 달 지낼 만한 액수였다.
결혼을 하고도 이씨는 계속 1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몇 푼 안되는 월급으로 어렵게 처자를 먹여 살리는 쪼들리는 생활에 싫증이 났다. 취미도 살리 생활에 보탬도 될 겸해서「천야」라는 잡지도 발간해 보았지만 이 계통의 사업을 해서는 목돈을 쥘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는 난생 처음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금까지 예술이다, 문학이다 하면서 방랑생활을 해 오는 동안 이씨는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쓰는데 더 익숙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아내가 있으니 그도 부양해야겠고 더욱이 그의 나이 중년에 이르렀으니 생활터전도 굳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마디로 그는 가난이 싫어졌다.

<영어 잘한다고 무역업 권유>
이럴 즈음 중국인 친구 한사람이 그에게『영어도 잘하고 하니 무역업에 손대 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예술가의「무드」에 젖어 온 이씨에게는 중개업만큼 적합한 직종이 없을 성싶었다. 왜냐하면 이 직업은 신이 나면 많이 벌자 들것이요, 싫증이 나면 낮잠만 자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결심을 한 이씨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무역 관계서적을 구했다고 스스로 상과대학의 교과과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대충 책을 사 모은 그는 약1개월 동안 틀어박혀 무역학 공부를 했다. 무역이론을 대강 터득한 그는 중국인 친구의 알선으로 태국산 원자재를 생산하는 화교거상을 찾아갔다.
그 회사는 주로 태국에서 목재를 벌채, 이를 미국이나 일본인 수출업자들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이씨는 자기를 믿어 주기만 한다면 이를 직접 도맡아 수출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대신 지금까지 미국·일본업자들에게 주는「커미션」3%를 1%만 받겠다고 제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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