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꼿꼿 총재'는 꿈도 꿀 수 없는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

투자은행 골드먼삭스의 보고서는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뒷맛이 개운찮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지난 6일 보고서가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었다. 아베노믹스로 인해 최근 엔화 값은 싸졌는데 원화 가치는 정반대로 상승 일로다. 이는 일본 상품과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벌써 자동차·전자 분야에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원화 값도 떨어뜨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다행히 물가가 낮다. 물가 걱정 없으니 기준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보고서의 주장은 그럴싸했다. 시장은 출렁였다. 6일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는 10원 넘게 하락했다. 과잉반응이었다. 보고서가 지나치게 엔화와 원화의 가치에만 현미경을 들이대 앞서 나갔다.

 금통위가 바로 과잉반응을 잠재웠다. 9일 열린 정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했다. 골드먼삭스발(發) 강풍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시장 참가자 대부분의 예상 그대로였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생긴다. 동결을 예상했으면서도 보고서 한 건에 시장이 허둥댄 이유는 뭘까. 골드먼삭스라는 명성이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겠지만 더 깊은 속내는 따로 있어 보인다. 현 금통위의 무게감이 떨어지다 보니 의외의 보고서가 나오면 시장이 확 쏠리는 게 아닐까.

 금통위 위원장인 김중수 한은 총재는 4년 전 총재 내정자 시절 “한국은행도 정부”라고 말했다. 이게 원죄가 됐다. 김중수 선장의 한은호(號)는 지난 4년간 이런저런 바람에 휘둘렸다. 시장 전문가들은 금통위의 기준금리 조정이 원칙 없이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튄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금통위가 시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재의 말이 왔다 갔다 하면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상식이다. 예컨대 김 총재는 지난해 4월 11일 “한국은 미국·일본 같은 기축통화국처럼 금리를 낮출 필요는 없다”(금리 동결)고 했다가, 다음 달 9일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를 낮춘 걸 내세우면서 기준금리를 내려 시장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번에도 금통위 회의 전인 6일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경기 부양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새누리당의 한 최고위원은 ‘(경기회복을 위해)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압박했다. 시장에서는 이런 압력에 김 총재와 금통위가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정서가 퍼졌다. 공교롭게 골드먼삭스 보고서가 때맞춰 나오자 시장은 확 쏠렸다. 금통위의 위상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통화정책’이라는 거함(巨艦)의 키를 쥔 선장은 한은 총재다. 4월 초 새 선장이 취임한다. 벌써 정부와 코드가 맞거나 정부 말을 잘 듣는 인물이 총재가 될 거라는 말이 무성하다.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시장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오직 국민의 부(富)를 지키는 데 매진하는 ‘꼿꼿’ 한은 총재의 출현은 영영 꿈인가.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