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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학원 가" 엄마들 방학 전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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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직장맘 전모(37·서울 서초구)씨는 요즘 집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친정으로 퇴근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6일 겨울방학 후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이른 아침에 맡길 곳이 없어져 아예 외할머니댁에서 지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만나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전씨는 “아이가 즐거워야 할 방학에 오히려 부모와 생이별을 한 셈”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씨는 비교적 일찍 여는 학교 돌봄교실에 문의했지만 “학기 중 다니지 않아 방학 때만 이용할 자리는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맞벌이 부부에게 방학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말했다.

 겨울방학을 맞은 엄마들이 ‘육아전쟁’을 치르고 있다. 부모들이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보육시스템이 미비한 탓이다. 맞벌이 부부는 당장 출근 전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 발을 구른다.

 은행에 다니는 정모(38·서울 서초구)씨는 초등 3학년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도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했었다. 오전 8시가 넘으면 도서실이나 교실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서 도서실 개방시간이 오전 9시로 늦춰졌다. 정씨는 하는 수 없이 오전 도우미를 구했다. 그나마 도우미가 오전 9시에 오기 때문에 정씨의 딸은 한 시간가량 집에서 혼자 지낸다.

 학교 시설은 방학이 되면 일제히 운영시간을 늦춘다. 본지 취재팀이 학기 중 오전 8시30~40분에 문을 열던 서울 성북·송파·양천구 초등학교 5곳의 방학 중 도서실 운영 현황을 조사했더니 오전 9시로 늦춘 곳이 세 곳, 오전 10시와 오후 1시가 각각 한 곳이었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관계자는 “보건복지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지역아동복지센터의 돌봄시설도 방학 중엔 대개 오전 10시에 문을 연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장맘들은 고육책을 찾느라 바쁘다. 정보기술(IT) 업체에 다니는 채모(43·서울 강남구)씨는 낮 12시부터 초등 4학년 아들을 돌봐 주던 도우미 아주머니 집에 아이를 데려다 주고 출근한다. 그는 “월 30만원을 추가로 부담하며 아침 공백을 메운다”고 말했다. 양모(38·서울 서초구)씨는 “아침에 보낼 곳을 수소문하다 다행히 교회 영어학원이 오전 8시30분부터 연다는 걸 알게 돼 겨우 아이를 맡겼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육아 도움을 받는 친정이나 시댁에 또다시 기대는 직장맘도 많다. 초등 3학년과 네 살 두 아들을 둔 이모(36·울산시)씨는 “방학이 되면서 친정어머니가 평일에 아예 집에 와서 지낸다”고 말했다. 그는 “맞벌이 부부의 출근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도록 허용하는 직장 문화라도 생겨야 여성이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외국에선 방학기간에도 학기 중과 같은 시간대에 프로그램을 운영해 맞벌이 부부를 배려한다. 프랑스 파리 주재원 시절 초등학교 자녀를 등교시키고 출근했던 전모(42·서울 강남구)씨는 “프랑스에선 방학이면 박물관 견학 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팀이 학교에서 활동하는데, 학기 중과 똑같이 오전 8시~8시20분에 아이를 데려다 주면 된다”고 소개했다. 육아정책연구소 서문희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도 학기 중과 같은 시간에 보육·교육이 가능하도록 예산을 지원하거나 시니어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업주부도 방학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학기 중보다 집에 오래 머무는 아이들의 식사부터 건강·교육까지 모든 것을 신경 쓰느라 ‘방학 증후군’을 앓는 주부가 많다. 초등 1, 3학년 자녀를 둔 안모(38·경기도 포천시)씨는 “방학 때면 학원뿐 아니라 스키장도 가야 하고 뮤지컬도 봐야 하고 여행도 가야 하니 엄마가 더 바빠진다”며 “늦잠 자는 아이들 깨우고 학원 가라고 씨름하다 보면 방학 며칠만 지나도 버거워지기 일쑤”라고 말했다.

김성탁·김기환·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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