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 개인숭배에 민심 변화 “덩샤오핑은 억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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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29면

1982년 9월 중순, 중공 제11기 1중전회에 참석한 1세대 혁명가들. 마오쩌둥 사후 한결같이 덩샤오핑의 복직을 주장했다. 앞줄 왼쪽부터 쉬샹첸, 천윈,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녠, 네룽쩐. [사진 김명호]

4인방 체포를 모의할 때부터, 1세대 혁명가들은 연금 중인 덩샤오핑의 복직을 염두에 뒀다. 쫓겨나기 전, 덩샤오핑의 직책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국무원 부총리, 총참모장을 겸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1>

마오쩌둥이 했던 결정과 지시를 유지, 준수해야 한다는 화궈펑의 결정은 예젠잉을 실망시켰다. 4인방이라는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한배를 탔던 사람들은 갈라섰다. 원인은 단 하나, 덩샤오핑의 복직 여부 외에는 없었다.

처음에는 복직을 반대하는 세력이 비호세력을 압도했다. 실권(實權)과 함께 덩샤오핑을 비판했던 마오쩌둥의 문건을 한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지(聖旨)나 다름없었다. 화궈펑과 왕둥싱을 필두로 베이징군구 사령관 천시롄(陳錫聯·진석련), 베이징시 제1서기 겸 전인대 부위원장 우더(吳德·오덕), 캉성(康生·강생)의 비서였던 중앙판공청 부주임 리신(李鑫·이흠) 등이 반대세력을 대표했다.

1962년 봄, 류샤오치(오른쪽)ㆍ천윈과 함께 회의장을 나서는 덩샤오핑(뒷줄).

정치국 내부에도 동조자가 많았다. 한결같이 문혁을 계기로 두각을 나타난 사람들이다 보니 덩샤오핑이 4인방에 동조하지 않은 점은 인정했지만, 전우로 여기지는 않았다. 1976년 4월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군중을 진압했던 우더는 덩샤오핑을 “덩 나치”라며 매도했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반혁명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했다. 군중을 동원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독일의 나치와 다를 게 없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죄상이 이미 드러난 사람이다. 마오 주석이 내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지지자들은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을 제일 두려워했다. 홍색 근거지 옌안(延安) 시절부터 중난하이(中南海)까지 마오쩌둥의 곁을 떠난 적이 없고, 문혁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왕둥싱 밖에 없었다. 마오의 친필 문건도 왕둥싱 외에는 열람이 불가능했다.

덩샤오핑은 납작 엎드렸다. 화궈펑에게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을 축하한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회신은 오지 않았다.

화궈펑은 말이나 행동이 무거웠다. 덩샤오핑의 편지를 읽고도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왕둥싱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며 한마디 하는 게 다였다. “경축대회에 덩샤오핑도 참석시켜라.” 왕둥싱이 “두꺼비처럼 생긴 게 또 잔재주 부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천안문광장에서 4인방 타도와 화궈펑 주석 취임을 겸한 경축대회가 열렸다. 우더가 행사를 주관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화궈펑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 덩샤오핑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알 길이 없다.

덩샤오핑의 복직을 은밀히 추진하던 화궈펑이 “마오 주석이 내렸던 결정을 굳건히 유지하고, 생전에 했던 지시를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덩샤오핑 비호세력들은 쾌재를 불렀다.

알다가도 모를 게 민심이다. 화궈펑에 대한 개인숭배가 일어나자 묘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병중의 저우언라이를 대신해 국정을 챙기다 4인방의 무고로 쫓겨난 덩샤오핑은 억울하다. 천안문 사건도 반혁명 사건이 아니다. 복직시켜야 한다”며 덩샤오핑을 그리워했다.

예젠잉은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위취안산(玉泉山)에 덩샤오핑의 거처를 마련했다. 베이징 서북쪽, 수목이 울창한 산 정상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들어선 집들은 중앙군사위원회 소유였다. 덩샤오핑이 자리잡자 군 지휘관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숨길수록 더 드러나는 법. “시내 한복판에 있는 중난하이를 상대할, 새로운 정치 중심이 베이징 교외의 산속에 출현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1977년 2월 18일, 산속에서 춘제(春節)를 맞이한 덩샤오핑은 예젠잉, 리셴녠, 쉬샹첸, 네룽쩐, 후야오방 등의 방문을 받았다. 노 원수(老帥)들이 모두 왔다며 즐거워했다. “네가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하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당장은 아무 힘도 없지만, 이들의 지지만 있다면 복귀는 시간문제였다.

두 진영의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3월 중순, 화궈펑이 중앙공작자회의를 소집했다. 그간 표현만 안 했을 뿐,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예젠잉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의 복직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어서 “마오쩌둥 생전의 지시와 결정을 준수한다”는 화궈펑의 주장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날 예젠잉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대놓고 화궈펑의 이론을 비판하기 2개월 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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