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젠잉 “인민은 새 통치자에 열광하다 이내 팔뚝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1호 29면

예젠잉의 예언은 적중했다. 화궈펑의 과도기를 거쳐 권력의 정상에 오른 실무형 지도자 덩샤오핑과 천윈. 1982년 6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4인방 체포 후, 예젠잉은 화궈펑의 능력을 인정했다. 군사위원회 정보국장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숭샹후이는 국민당 통치 시절 장제스의 안방 깊숙한 곳에 침투했던 특수공작원 출신답게 입이 무거웠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0>

화궈펑은 평생 우산을 쓰지 않았다. 후난성 샹탄현 서기 시절인 1965년 봄, 마오쩌둥이 태어난 사오산(韶山)의 관개시설 공사를 화궈펑이 지휘하고 있다.

“화궈펑에겐 영수의 자질이 있다. 역시 마오 주석은 영웅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한 차례 난리를 치르면 나라가 안정된다. 지금이 그런 시기다. 4인방 중 3명을 처리하는 건 별것도 아니었다. 장칭은 마오 주석의 부인이다. 그 누구도 감히 잡아가둘 결심을 못했다. 어리숙하면서 지혜롭고, 겸손과 용기를 겸비한 화궈펑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도 장칭 체포는 엄두를 못 냈다. 저우언라이가 살아있어도 못했을 거다. 덩샤오핑은 말할 것도 없다. 문약(文弱)해 보이는 사람이 일을 벌이면 우리 같은 사람보다 더 사납고 무섭다. 화궈펑은 속이 깊다. 남의 강요에 의해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다. 대국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

내친김에 왕둥싱의 인물평도 했다. “왕둥싱은 경호대장을 오래한 게 흠이다. 주석이 세상을 떠나자 4인방은 8341부대를 해체시키려고 했다. 주석의 후계자 화궈펑이 구상한 4인방 체포에 적극 가담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경호책임자나 비서실장들은 화류계 종사자와 비슷하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 앞에서 쩔쩔매는 고위층들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말로(末路)가 비참할 수밖에 없다. 왕둥싱은 예외다. 16세 때 홍군에 가입해 장정과 항일전쟁, 해방전쟁을 함께한 오랜 전우다. 4인방 제거에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대국(大局)을 보는 눈은 부족하지만 우리 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앞으로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개인의 명예보다 당과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테니 두고 봐라.”

끝으로 “인민은 실패를 반복한다.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하면 우리가 바라던 지도자라며 열광하다가 이내 팔뚝질을 해댄다. 박수갈채 보낼 때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으면 별것도 아닌 일로 등을 돌린다. 밥 먹으면서 똥 눌 걱정하는 실무형 지도자가 필요하다. 내 나이 80, 나는 너무 늙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덩샤오핑과 천윈밖에 없다”며 먼산을 쳐다봤다.

한동안, 화궈펑이 덩샤오핑의 복직을 반대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덩샤오핑, 화궈펑, 예젠잉, 천윈 등이 세상을 떠나자 사실이 밝혀졌다. 예젠잉과 슝샹후이의 대화가 있을 무렵, 화궈펑은 정치국 회의에서 대놓고 덩샤오핑의 복직을 주장했다. “덩샤오핑이 업무에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절차가 중요하다. 중앙 회의에서 당당하게 선출됐으면 좋겠다. 덩샤오핑이 일할 수 있도록 공작을 진행해라.”

덩샤오핑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12월 10일 밤, 덩샤오핑의 전립선염이 악화됐다. 순전히 화궈펑 덕에 301의원 독방에 입원이 가능했다. 덩샤오핑은 의사가 수술을 권하자 화궈펑과 왕둥싱에게 편지를 보냈다. “수술을 허락해 주십시오.” 수술을 받으려면 상급기관의 허락이 필요할 때였다. 당시 덩샤오핑은 그냥 평당원이었다.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

화궈펑도 답장을 보냈다. “4인방 시절에는 의료시설이 신통치 않았다. 이제 4인방도 없어졌으니 맘 놓고 치료에 전념하라”며 수술을 비준했다. 왕둥싱도 동의서에 서명했다.

덩샤오핑의 입원소식이 알려지자 옛 동지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덩샤오핑은 “앞으로 오줌 눌 때마다 화궈펑과 왕둥싱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원로들의 농담에 폭소를 터뜨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1977년, 새해가 밝았다. 덩샤오핑의 병실은 여전히 방문객들로 붐볐다. 1월 8일, 베이징의 중심을 가르는 시단(西單)의 상가 벽에 표어가 나붙었다. “단호히 요구한다. 덩샤오핑 동지를 공직에 복귀시켜라.” 같은 내용이 덕지덕지, 10m가 넘게 붙었다. 전국이 들썩했다. 공안기관은 홍위병 영수 출신인 주모자를 체포했다. 덩샤오핑 아들의 친구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왕둥싱은 덩샤오핑 주변을 의심했다. 화궈펑은 심기가 상했지만 속으로 삭혔다.

2월 27일, 화궈펑의 악수(惡手)가 인민일보 1면을 장식했다. “무릇(凡是), 마오 주석이 내렸던 결정을 우리는 굳건히 유지해야 한다. 무릇(凡是), 마오 주석이 생전에 했던 지시는 어김없이 준수해야 한다.” 마오쩌둥이 내쫓은 덩샤오핑의 복직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