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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질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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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베스트셀러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얼마나 사람들이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그 평가가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누구든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평가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생은 중·고등학교의 시험에서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거쳐 입사시험이나 임용고시로 이어지는 시험평가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운이 좋아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이 되었다고 해도 은퇴할 때까지 비록 시험은 아닐지 몰라도 승진을 위한 각종 평가는 피할 수 없다.

 물론 평가는 사람들을 열심히 노력하게 만든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열심히 노력하게 만드느냐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뛴다면 목표에 가까워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평가의 내용과 지표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평가 중에 과연 본연의 목표에 적합한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아마 대학수학능력시험일 것이다. 대입 적령기의 거의 모든 학생이 응시하고, 여기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그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시험인데, 과연 그 평가의 내용이 우리 사회의 미래 인재를 키우는 데 적합한지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로서 창의적인 인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행 수능이 학생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하나의 질문에 대해 4시간에 걸쳐 논술식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프랑스 대입자격시험 바칼로레아가 학생들의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물론 시험의 객관성과 공정성도 중요하고,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을 줄여야 하는 사회적 당위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걱정하다가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히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세계적 경쟁시대에서 이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자기들끼리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수능이 정말 재능과 창의력이 넘치는 학생들을 기르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적어도 그런 인재들을 위한 길을 따로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본질적인 고민 없이 창조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창조경제를 위해 필수적인 국가 연구개발(R&D) 과제의 평가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한국은 ‘빠른 추격자’ 모델로 선진국의 기술을 모방하고 빨리 습득해서 개선하는 방법으로 발전해 왔다. 국가의 R&D 과제 관리나 평가도 이런 모델에 맞추어 양적인 지표를 중시하고 가시적 성과가 나오는 데 치중해 왔다. 이런 방식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효율적이었고, 우리가 선진기술을 빨리 따라잡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우리가 딱히 모방할 선진국도 없고 스스로 앞서 나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에 맞추어 R&D 과제의 평가 시스템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지난 달 국가과학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앞으로는 연구 과제의 도전성과 창의성을 중시하고, 성실 실패를 용인하겠다고 한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과 위주로 평가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꾸준히 정착시켜 나가야 기술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효율성이 문제가 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기관 및 기관장 평가를 강화하겠다고 한다. 평가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제대로 된 효과를 얻으려면 평가의 질을 높이는 것이 선결과제다. 지금까지의 평가는 백화점식으로 온갖 항목이 나열되어 있고, 그나마 양적인 지표가 중시되어 기관의 본질적인 임무나 성과를 집중적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대입수능시험처럼 자신의 전공을 아주 잘하기보다는 모든 과목을 적당히 잘하는 것이 유리한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기관 간의 줄 세우기가 목적인 경우가 많아서 기관 성격에 맞지 않는 획일적인 지표를 적용하기도 한다. 이래서는 평가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어차피 현대와 같은 경쟁사회에서 평가는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 평가는 고래를 춤추게 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과연 지금 시행하고 있는 평가가 개인과 조직의 핵심 능력을 키워주고 있는지 아니면 공연히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