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판결문 표현 하나에 사법부 신뢰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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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회적 갈등을 정리해야 할 법원 판결이 오히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론에 관한 시비가 벌어질 때도 있지만 판결문 표현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점에서 이성호 신임 서울중앙지법원장의 고언(苦言)은 판사 모두가 새겨들을 만하다.

 이 원장은 그제 취임식에서 “각자가 사법부 전체를 대표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판결문상의 표현 하나하나에도 더욱 신중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판결 이유상의 표현 하나 때문에 진의가 왜곡되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며 “당사자와 국민의 승복을 얻기 위해선 판결문에서도 품격이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의 지적은 최근 법원에서 나온 판결문들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과 관련돼 있다. 무단 방북해 김일성 시신을 참배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의례적 표현으로 볼 여지도 있다”며 일부 무죄가 선고됐다. 선고공판에서 “판결문을 두 개 써왔다”고 말한 사례도 있다.

 판결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판결은 해당 사건의 당사자에게 적용되지만 관련 사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사법부 전체의 입장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판결문에 담긴 내용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같은 사안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원장이 거론했듯 ‘벤츠 여검사’ 사건에서 변호사가 검사에게 준 벤츠는 ‘사랑의 정표’가 아니라 ‘불륜의 대가’라고 해야 맞다. 더욱이 판결문에 판사 개인의 소신이나 느낌을 과도하게 강조한 표현을 넣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연간 1인당 60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하는 판사들로선 판결문 작성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다만 판결이 국민과의 소통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많은 일이 달라질 수 있다. 판결문에서 판사들의 교양과 지성, 품격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