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거 창 사건(12)|후유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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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거창 사건은 군 재 결심과 함께 공식적으로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현지에서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정부는 주민처형의 책임을 물어 군 관련자를 처벌했지만 거창군 신원 면에 묻힌 「시한폭탄」의 신관은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가족들에 대해 정부 시책에 대한 계몽이나 선 무 공작을 소홀히 한 것이다. 또한 4·19후부터 5·166전까지는 피해지역에 대해 행정력을 확립하지 못하고, 거의 방임하다시피 해 유족들의 불만이 때로는 미묘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이는 비단 거 창뿐 만 아니라 공비가 출몰했던 다른「민감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로서 거창 사건의 후유증과 악순환은 사건자체와 함께 정부와 국민이 모두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교훈을 남겼다.

<소홀한「민감 지역」계몽>
첫 후유증은 사건발생, 꼭 10년 만인 1960년 5월11일에 유족들이 사건당시 신원면장이었으며 주민처형 때 통 비 분자 심사를 거들었던 박영보 씨를 때려 숨지게 함으로써 나타났다. 이날은 4·19가 난지 불과 20일만으로 바로 유족들이 그 동안 마련한 묘비를 묘지에 나르고 있었다. 이 묘비는 자유당 정권 때 3·15선거를 앞두고 경남도청에서 지원해준 도 비 50만원과 묘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모금한 기금 등으로 만들어 공동묘소에 세우기로 한 것이다. 묘소에 모인 1백여 명의 유족들은 묘비를 운반해놓고 하오3시쯤 20말 가량의 막걸리를 가져다 마셨다. 술에 취한 유족 중 누군가가 사건진상을 박 면장(이때는 양조업경영)에게 가서 물어보자고 말했다. 박 면장을 데려다 참 묘 시키자는 유족도 있어 자연히 모두가 흥분상태에 빠졌다. 다음은 목격자들의 이야기.
▲임주섭씨 (당시 양조업·현신원사실우체국장·52) <그날은 거창 장날이라서 나는 읍장에 갔다와서 친구들과 양지 리의 박영보씨 집 근처에서 술을 나누고 있었어요. 아마 저녁5시쯤으로 생각되는데 함성이 들립디다. 그러자 박 면장 댁 이웃집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사람들이 박씨를 잡아가니 말려달라는 거예요. 박씨는 저녁을 먹다가 끌려갔다고 해요. 박씨가 거창사건 후 유가족들과 전혀 접촉이 없고 4·19후부터는 공기가 좀 이상해 몸조심하라고까지 일러주었는데 기어이 무슨 변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가보니 1백여 명의 유족들이 끌고 가서 내가 말렸더니 흥분한 그들은 나까지 마구 때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디다. 그래도 끌려가는 박씨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고형 리 관동 커브 길까지 약 10리쯤 갔을 때 앞에서 헤들 라이트가 환하게 비쳤어요.
이날 바로 부임한 강재동 거창 경찰서장이 보고를 받고 말리러왔다고 하며 유족들을 달래는 연설을 하데요. 경찰관을 10여명 데리고 왔는데 서장이 박 면장을 내놓고 해산하라고 하자 그만 유족들의 흥분이 폭발, 마구 돌을 던집디다. 서장이 박씨를 가로막자 그는 서장 다리사이에 주저앉았어요. 서장도 옷이 찢기고 머리가 터지는 등 부상을 했고, 박씨는 어느새 숨지고 말았어요,>
▲임기섭씨(당시유가족회원·현 농업·43)<나는 부모님과 동생을 거창 사건 때 잃었어요. 그래서 60년 5월11일에 묘비운반을 위해 유가족과 묘비건립추진위원들이 모이는 묘지로 가서 작업을 했습니다.
묘비운반을 마치고 모두 점심과 막걸리를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사건 당시의 박 면장한테 좀 따져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2백 여명이 묘소에서 10여 리 되는 양지 리로 몰려갔어요. 나는 좀 뒤늦게 따라갔는데 유족들이 박씨를 끌고 나오며 밀고 밀치고 하더군요. 저녁 5시 좀 넘어 일행이 신원면 소재지 거의 다 와서 관동부락에 이르니까 트럭 1대에 타고 오는 경찰이 가로막습디다. 그러더니 강 거창 서장이 박 면장을 둘러싼 유가족들에게『여러분의 심정은 잘 압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하며 위로의 말을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유족들은 울음바다가 되고 일부는 흥분하기 시작했어요.

<말리던 서장도 옷 찢기고>
이때 서장이 박씨를 데려가려고 하자 서로 승강이가 벌어졌고 이러는 사이에 어느새 돌이 날아들었어요. 결국 박씨는 돌멩이 세례로 숨졌는데 이땐 벌써 날이 꽤 어 뒀어요. 누군가가 숨진 박씨 시체에 나뭇단을 갖다놓고 불을 지릅디다. 사태가 이쯤 되자 경찰은 유족들에게 해산하라는 말만 남기고는 물러났고 유족들은 묘지에 올라가 울기도 하고 더러는 양조장에 가서 술을 퍼먹기도 했어요. 얼마 안 있다가 이번에는 10여명의 군인들이 와서 그중 대위가 『박 면장을 죽인 것이 폭동이냐? 혹은 사감에서냐?』고 묻더군요. 유족들이 모두 사감이라 하니까 『해산하라』고만 하면서 돌아갔어요. 그래서 이날 밤은 모두 헤어졌습니다.
이튿날 다시 유족들을 면사무소에 오라고해서 가족까지 5백 여명이 모였는데 강재동 경찰서장이『유족모두를 박 면장 사건죄인으로 데려 갈 수 없으니 주동자만 잡아가겠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유족들은 주동자란 없고, 잡아가려면 우리 모두를 잡아가라고 경찰 차에 매달리며 아우성을 치니까 서장도 어쩔 수 없는지 그냥 돌아갔어요. 그리고는 5·16까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박영보 씨가 유족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11사단9연대3대대가 통 비 주민을 심사할 때 3명의 거 창서 사찰 계 형사와 함께 거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종목씨 말을 빌면 주민 중에서 군경과 공무원가족을 가려 낼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닌데도 그편에 많이 끼어 들었는데 박 면장이 이「가짜가족」들을 적발했기 때문에 피해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유가족들의 원한을 샀다고 말하고있다.
그러나 현 함양 거창 출신의 민병권 의원은『그 지방의 모 정치인이 유족들을 선동해서 저지른 참사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하간 유족들의 분노가 사건발생 10년 만인 4·19후에 폭발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했고 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과정이나 민주당정권이 박 면장사건을 덮어두었다는 점이다. 유족들의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불법적인 집단 사형살인행위였다.

<「가짜가족」적발에 분노>
이때 주동자만이라도 가려내어 의 법 처벌했더라면 제2의 후유증과 악순환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중론이었다. 심하게 말해 4·19후부터 5·16까지 이 지역에는 행정력이 마비돼 있었다고 하겠다. 제2의 후추 증 은 5·16후 박 면장친척이 유가족을 핍박하고 공동묘소에 세운 묘비와 위령 비를 쓰러뜨림으로써 나타났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은 약간 엇갈리고 있다.
▲민병권씨(당시 육본부관감=대령·현 국회의원=함양-거창 출신·52) <5·16 혁명이 나자 박 면장의 친척으로 군에 있던 박 모 대위가 돌아와서 다시 보복한다고 묘비를 넘어뜨리고 야단법석을 떨었어요.
이 통에 4·19후에 박 면장 살해주동자들은 겁을 먹고 뿔뿔이 헤어졌어요. 유족들 심정이야 알겠지만 박 면장 사건 때 법질서를 확립했더라면, 이런 악순환은 피할 수 있었겠지요.
지금 신원 면에는 유족 52가구가 살고있는데 해마다 한번씩 위령제를 지냅니다. 이런 민감 지역에는 교육·도로·통신 등 개발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시켜왔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일우씨(현 신원면 부 면장·37) <묘비에 새긴 비문내용이 매우 애절하고 가슴아파요. 그래서 5·16후 박 면장의 친척 되는 군인이 와서 이 비를 세워둠으로써 지나가는 사람마다 좋지 않게 생각할까봐 매몰한 것으로 압니다.>
▲임주섭씨(당시 향토방위대장·현 신 원면 사설 우 체 국장) <경남지사의 묘 개장 명령에 따라 유족을 모아놓고 경찰입회 하에 그렇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족 회를 처음에는 무슨 용공단체 비슷한 오인한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는 그 묘비에 대해 별로 관심들이 없나봐요.>

<막을 수 있었던 악순환>
한편 박 면장살해사건은 5·16후에야 법의 심판을 받았다. 박 면장 유족 측은 40여명을 고소했으나 18명이 구속되어 부산에서 열린 군 재에서 9명은 집행유예를, 나머지 9명은 무죄를 각각 선고받고 나왔다. 다음은 이 사건 관계 피고들의 이야기.
▲임채화씨(당시 유족회원·현 대현리 거주·50) <박씨 살해사건에 관련된 유족들이 구속돼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면회하러 갔어요. 그런데 경찰은 나를 유족회의 한사람이라고 구속합디다. 결국 83일만에 풀려 나왔어요. 그후 몇 해지나 주민등록증을 만들 경찰서에 갔더니 당신은「면장살해사건」으로 입건됐다가 기소중지 된 사람이라면서 구속하데요. 거창과 진주 등지에서 1백85일간 구속됐다가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임기섭씨(당시 유족회원·현 농업·43) <1962년 2월에 20여명이 거창 경찰서로 연행되어 3일간 면장살해사건의 조사를 받았어요. 1차 조사에서 몇 명은 나가고 18명인가가 구속됐습니다. 그후 부산지검과 거창 지청에서도 두세 번 조사를 받고 그후 부산형무소로 이송됐어요. 거기서 6개월간 수감된 후 9월초에 군 재를 받았어요. 나는 징역 5년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바로 나왔지요.>

<주요일지> (1951년 5월14·15·16일)
※5월14일 ▲적, 인제 북방서 공세 ▲국회, 이부통령 사표수리가결 ▲국회, 거창 사건 조사처리에 관한 결의문 가결
※5월15일 ▲적, 춘천지구에도 중압 ▲부통령에 김성주씨 피선 ▲브래들리 합참본부의 장 국회에서 한국전 증언
※5월16일 ▲적, 중동부전선서 공세 ▲유엔군, 하루에 적3천5백 명 살상

<알림>=『민족의 증언』은「거창 사건」을 이번 회로써 끝내고 다음항목인「적의춘계공노」는 명년 1월4일(화)부터 다룰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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