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그저 후회막급이 되지 않도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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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두 해 전이던가, 미국에서 잠깐 나온 배우 김지미씨를 인터뷰했다. 영화계 원로들이 자주 모이는 강남의 한 사무실. 서둘러 온 그가 숨 좀 돌리자며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들러 오느라 좀 늦었지. 난 미국에서도 가끔 이 맛이 생각나. 한국 올 때마다 질리게 먹고 가요.”

 원로들의 얼굴이 애들처럼 밝아졌다. “아, 태극당 모나카네. 이게 아직도 나오는구나?”

 모나카를 하나씩 물더니 어느덧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아이스크림처럼 분위기가 녹았다. 나도 한입 베어물었다. 맛이 진했다.

 태극당 모나카라니, 몇십 년 만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퇴근길 손에 가끔씩 들려 있던 태극당 갱지 봉투가 떠올랐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하나다. 엄하신 분이었는데, 이건 좀 달콤한 기억이다.

 갑자기 웬 태극당이냐고? 기사를 검색하는데 크라운베이커리 폐업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그냥 오래된 제빵업체가 문을 닫는다기보다, 이렇게 또 한 시대가 끝나는구나 싶다. 인사동 초입에 있던 그 크라운베이커리도 이제는 사라지겠구나. 인사동에서 약속을 하면 거기서 먼저 만나곤 했다. 그때 나와 만나서 팔짱을 끼고 걸었던 수많은 친구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사라진 것투성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약속 장소였던 강남역 뉴욕제과도 지난해 문을 닫았다. 엄혹한 80년대였지만 강남역 근처 디스코텍은 춤추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뉴욕제과에서 만나 디스코텍으로 가는 동선이었다. 종로에서 종로서적이 사라진 지도 오래다. 미팅을 하거나 데모가 있거나 전부 종로서적으로 모였다. 삐삐나 휴대전화 같은 연락수단이 없어서 종로서적 입구 게시판에 메모 쪽지들이 빼곡했다.

 태극당이야 우리 세대를 훨씬 앞서 1970년대에 명성의 정점을 찍은 곳이지만, 모든 사라지는 것 사이에서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뭉클해진다.

 마침 지인인 연세대 교수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학교 정문에서 캠퍼스로 이어지는 백양로가 ‘백양로 재창조’ 사업으로 없어질 위기라 교수들이 반대 서명을 한다는 것이다. 동문이 아니니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같은 대학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의 말대로 “80년대 세계 뉴스에 자주 등장한 유서 깊은 곳”이다. “신촌역 철길 위에서 외신기자들이 학생과 경찰이 벌이는 투석전 장면을 찍어 전 세계로 보내곤 했다.” 장소의 상징성뿐 아니라 내부 동의 절차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시인 고정희는 썼다. 절절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라지는 것들은, 그저 후회막급만을 남길 때도 있다. 이미 충분히 그런 사례들을 보아왔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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