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김정은과 원산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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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영종
정치부문 차장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에겐 공개하기 곤란한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의 생모 고영희가 일본 오사카(大阪) 태생의 북송 재일동포란 점이다. 제주 출신의 교포 고경택의 딸인 고영희는 북한행을 택한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 초 북송선을 탔다. 북·일 당국 합의에 따라 1959년 12월 시작된 북송사업으로 67년까지 북으로 간 사람은 모두 8만8000명. 이들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째포’란 속칭으로 불리며 박대를 당했다.

 그런 출신성분을 밝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북한은 그녀를 ‘평양의 어머니’로 내세우며 주민들이 고영희의 실체에 접근하는 걸 차단하려 부심하는 분위기다.

 고영희에게 굳이 지명을 붙여 특징짓자면 ‘원산댁’이 맞는 표현이다. 그녀가 탔던 북송선 만경봉호가 일본 니가타(新潟)항과 북한 원산항을 오갔으니 말이다. 우리 정보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김정은의 원산 출생설도 고영희와 원산의 인연 때문에 나왔다.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일하다 김정일의 눈에 들어 동거를 시작한 고영희는 유선암으로 2004년 5월 파리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28년간 함께했다. 2남1녀를 두며 사실상 정부인 역할을 한 고영희가 전용 별장인 원산특각에서 김정은을 낳았다는 스토리는 대북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 회자된다.

 물론 북한은 김정은이 평양 강동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이곳에 생가를 조성해 우상화 작업에 대비하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소련 브야츠크 병영에서 태어난 김정일을 ‘백두산 장군’으로 만들려 출생지를 조작한 북한이 조만간 또 하나의 출생신화를 들고나올 것으로 보인다. 고영희를 ‘국모(國母)’로 추앙받게 할 감동 스토리도 곁들여질 게 분명하다. 최고권력자의 숨겨진 동거녀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생모에 대한 연민이나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일까. 김정은이 요즘 들어 각별한 원산 챙기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11일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소집한 김정은은 모두 10개 항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원산을 세계적 휴양지로 만들기 위해 “건설전투를 밀고 나가라”는 지시가 눈길을 끈다. 장거리 로켓 개발 지시보다 우선순위가 한 단계 앞서 거론됐으니 당 간부들이 바짝 긴장할 만하다.

 이번 주 들어서는 원산에 북한 육·해·공군의 주력부대와 군사장비가 속속 집결하고 있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설명이다. 지난 1일 시작된 한·미 합동 군사연습에 대응한 대규모 무력시위가 벌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핵·미사일 도발에 이어 한반도 위기지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릴 기세다.

 ‘세계적 휴양지’ 건설 후보지로 점찍어 준 곳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핵폭탄으로 워싱턴을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서방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건 생뚱맞다. 자신이 사령관을 맡고 있는 최고사령부를 내세워 ‘서울 핵 불바다’를 운운해 놓고 ‘우리 민족끼리’를 입에 올리는 것도 그렇다. 해외유학파인 29세 청년 지도자의 병정놀이는 이만하면 됐다.

이 영 종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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