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복지국가 건설할 경제 수준… 성장 통해 안정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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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05면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당선 확정 다음날 두 명의 외국 지도자와 맨 먼저 전화 통화를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박 당선인은 의원 시절인 2000년 처음으로 메르켈 총리를 만나 지금까지 각별한 우정을 쌓아 왔다. 대선 기간엔 메르켈 총리가 박 당선인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서신을 보내 논란을 낳기도 했다.

독일 지식인이 보는 ‘박근혜 시대’… 페터 스투름 박사 e-메일 인터뷰

독일은 여러 가지로 한국의 롤 모델이 되는 국가다. 메르켈 총리의 여성 리더십뿐 아니라 경제민주화, 사회복지, 성장과 일자리, 평화통일을 보기 드물게 달성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독일 지식인들은 ’박근혜 정부’의 탄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중앙SUNDAY는 독일 지식인이 ‘박근혜 시대’에 거는 기대와 희망을 들어봤다. 경기대 김택환(언론미디어학과) 교수가 여러 차례 e-메일을 통해 독일 권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논설위원이자 아시아담당 국장인 페터 스투름(Peter Sturm·55·아래 사진) 박사를 인터뷰했다. 다음은 스투름 박사와의 일문일답 요지(※표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다).

독·미 동맹 토대서 소련과 우호관계 다져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경제 발전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성장이 중요하다. 또한 이번 대선에서 나타났듯 한국같이 정치적으로 분열된 양 진영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상대방을 보듬는 일이 가장 필요하다.”

-외교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과거 역사를 딛고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개선시키는 일이다. 물론 한·일 간의 과거사 때문에 이것이 쉽지는 않을 수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유령이 살아 춤추는 지역이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헤쳐나가는 게 바람직한가.
“북한은 아주 가난한 나라다. 젊은 지도자인 김정은이 지난해 새로 권력을 잡았다. 남북한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한 외교가 필요하다. 특히 보여주기 위한 ‘쇼’나 이벤트성 외교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stille Diplomatie, keine Showveranstaltungen). 남북 사이에 긴장 완화가 중요하다. 이런 조용한 물밑 외교 활동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한·중·일 동북아시아가 요동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이 영토 문제를 놓고 분쟁 중이다. 민족주의 바람도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은가.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게 꼭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민족주의적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의 역할은 작은 파트너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으로선 더욱 통 크게(Die Grossen)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에 대해) 자연스럽게 항상 화해가 준비돼 있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중국이 미국에 대적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G2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미국과 정치·군사적으로 튼튼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어떤 외교 스탠스를 취해야 하나.
“사람은 자신의 친구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이 한국의 적(敵)이라는 말은 아니다. 독일도 통일되기 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외교적 고민이 많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택했다. 당시 독일은 미국과의 확고한 동맹 토대 위에서 소련과 평화에 기반한 우호적인 정치를 펼쳤다(※그 결과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번 한국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사회 양극화에 대한 우려도 높다. 한국이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 정치를 경험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회복지 확대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했다.
“한국은 사회복지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경제 수준에까지 도달한 국가다. 복지를 위한 경제적 토대가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독일처럼 당장 모든 사회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가는 게 중요하다.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복지를 위해선 많은 돈이 소요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복지 선진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1883년부터 ‘철혈 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가 3대 의무보험인 의료·산재·연금보험 제도를 실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강화했다. 의료·실업·연금보험에다 간병 및 휴양보험 제도까지 도입했다. 실업자에 대해서도 국가가 외면하지 않는다. 국가 주도로 재취업 연수 프로그램을 운용하며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한국에선 반값 등록금 문제가 쟁점이지만 독일은 아예 대학생 등록금이 없고, 치열한 대입 경쟁, 사교육, 학교폭력이 없는 ‘4무(無) 나라’다.

-많은 한국인은 독일 통일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우리는 남북한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독일 통일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경험했다. 그러나 한국이 남북한 통일을 위한 정확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국가 재정이 튼튼하다면 통일의 순간을 맞았을 때 부담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독일은 통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연대부가세’를 신설했다. 개인 소득세와 법인세에 5.5%의 부가세율을 적용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옛 동독 지역에 20년간 1조6000억 유로(약 2270조원)를 투자했다. 이는 독일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해당한다. 그 덕에 독일통일 20년이 지나 옛 동독 지역의 경제력은 서독 수준에까지 근접하고 있다).

새 대통령 내년 독일 방문 반가워
-한국에서 역사상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다. 여성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가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에게 조언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매우 기쁜 일은 내년에 새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다고 발표한 내용이다(※박 당선인은 메르켈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내년에 독일을 방문할 뜻을 밝혔다). 박근혜 당선인은 정치 경험이 많은 유능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은 한국(당시 조선)과 독일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체결한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바람직한 한·독 관계는.
“한국과 독일은 중요한 파트너다. 좋은 파트너로 서로 곁에 존재해야 하고, 미래에도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게 바람직하다. 또한 한·독 간의 경제적인 경쟁 역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경쟁은 누구를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한·독 관계는 생각보다 돈독하다. 내년은 또 한국이 서독에 광부를 처음으로 파견한 지 50주년이 된다.)

한국과 독일은 유사점이 많은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의 아픔 속에서 경제 기적을 만들었다. 독일이 거둔 라인강의 기적은 한국으로 건너와 한강의 기적이 됐다. 천연자원이 없어 인재부국을 추구하는 것도 비슷하다. 인구 규모도 8200만 명(한국+북한+해외동포)으로 엇비슷하다. 대한민국에 대규모 차관을 처음으로 준 나라도 독일이다. 독일 사회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직·간접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은 유럽 통합의 기관차이자 중심 국가다. 한국의 많은 국민은 ‘G8(주요 8개국)’ 중 가장 많이 배워야 할 국가로 독일을 첫째로 손꼽는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얼미터의 조사 결과다. 독일은 분단, 경제발전에 이어 복지·통일 측면에서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라는 얘기다.



김택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독일 본대학에서 언론학·정치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땄다. 한국언론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미국 조지타운대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중앙일보 미디어전문기자와 멀티미디어랩 소장으로 활동했다. 저서 『넥스트 코리아』『다음 대통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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