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대기만성(大器晚成)’이란 말은 애초에 없었다?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대기만성(大器晚成)’이란 말은 애초에 없었다?

     ━  ‘대기만성(大器晚成)’ 과 ‘대기면성(大器免成)’     사진 바이두 노자의〈도덕경〉에 ‘대기만성’이란 구절이 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성공한다’는 뜻이다. 먼 장래는 고사하고, 바로 내일이 답답한 청춘들에게도 위로가 된다. 중년을 넘어 의지할 이렇다 할 ‘연줄’이 없어도 ‘성실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고 있는 이들을 잡아주는 ‘줄’이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을 의도는 없지만) 원래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노자의〈도덕경〉을 읽다 보면,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넘어서 ‘초월’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초월이 아니라, 애당초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이라는 문턱은 없었다. 그 문턱과 그런 장애물은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니 ‘초월’이 아니라 그냥 원래로 돌아가면 된다고 말한다. ‘넘어야 할 것, 견뎌내야 할 것’이 애당초 없었는데, 무엇을 얻겠다고 애쓰나? 왜 이렇게까지 바둥거려야 하나?   치열한 일상의 경쟁 속에서, 노자의 가르침은 언뜻 보면 현실적 도움이 안 된다. 읽기 편한 ‘자기계발서’ 한 권이 훨씬 나아 보인다. 그러나 노자는 단 몇 줄만 읽어도, 그 뜻을 기껏해야 어렴풋이 밖에 이해가 안 되어도 ‘뜻밖의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국가적 재난이 와도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 고개를 드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지금, 노자를 읽으면 그래도 어깨가 펴진다. 나도 모르게 그래도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잠깐이나마 머리가 맑아진다.     ‘대기만성’, 지금이 다가 아니다.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더 좋은 앞날이 있다. 희망이다. 감사하다.       1972~4년, 중국 후난성 창사(長沙)에선 기원전 약 200년경의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 비단에 쓰인 노자의〈도덕경〉이 발견됐는데,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왕필(226~249)의 그것보다 대략 400년이나 앞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오래된 판본에는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大器免成)’이라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만성(晚成)’이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라면, ‘면성(免成)’은 ‘(이미 있기 때문에 굳이 새롭게) 이룰 필요가 없다’ 혹은 ‘굳이 만들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즉, ‘대기면성’의 의미는 ‘진정한 큰 그릇은 원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게 된다.   만성(晚成)이 맞는 걸까? 면성(免成)이 맞는 걸까? 무엇이 진짜 ‘노자의 생각’이냐에 대해선, 우선 더 오래된 진품이 진짜일 확률이 높다. 즉, 원래 노자가 한 말은 ‘대기면성’일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왕필은 원래 도가(道家)와 대척점에 있는 유가(儒家) 배경이다. 유가의 시각으로 도가(道家)를 해석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자로 대표되는 도가는 ‘무위(無爲, 아무것도 안 한다. 인위적인 것이 없다)’를 강조한다. 모든 인위적인 것은 오히려 도(道, 진리)와 멀어진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행위로) 학문을 하는 것은, 매일 보태는 것이다(爲學日益). 도를 행하는 것은, 매일 덜어 내는 것이다(爲道日損)”. 역시 노자(도덕경)의 말씀이다. 여기서 전자는 ‘유위(有爲, 행위)’를 통한 배움을 중시하는 유가를 말한다. 후자와 같이 매일 인위적인 것을 덜어내어 무위(無爲)의 경지로 가야 한다는 태도는 도가다.   ‘도’ 즉 진리에 이르는 길은 ‘보탬’이 아니라 ‘덜어냄’에 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노자는 매일 우리의 모든 인위적인 것을 덜어내야 ‘무위’라는 최고 경지에 이른다고 말했다. ‘대기만성’은 노자의 중심사상인 ‘무위’ 와도 거리가 한 참 멀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의미적으로도, 노자가 한 말은 ‘대기만성’이 아니라 분명 ‘대기면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조차도, ‘대기면성’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의외로 적다. 일상에는 오직 ‘대기만성’만 있고, 또 이것이 ‘노자’의 말이라고 알고 있다.   틀린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최소한 ‘대기만성’은 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현실에는 “노자도 대기만성이라고 했어! 실망 말고 더욱 힘내!”라고 말하는 이는 있어도, “노자는 대기면성이라고 했어. 그냥 초월하셔!”라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다.      ━  논리적 ‘설명’보다도 유효한 ‘설득’이 더 중요하다.   ‘실용성’이 ‘정통성’을 이길 수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가는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실용성에 방점을 두는 듯하다. 지식은 지식대로 사용하고, 지혜는 지혜대로 활용한다.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어떤 지식은 지혜에 묻힌다. 실용주의다. 그러다 보니 “맞는 것을 맞다”라고 따지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 ‘옳다와 틀리다’의 판정보다는 조화를 중시한다.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협상에서 ‘우리의 객관적이고 타당한 조건’이 종종 수용되지 않는 배경이다. ‘설명’은 되지만 ‘설득’이 안되는 이유다.   “중국인들은 ‘심정적으로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이미 오래전에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의 이분법적 함정에서 빠져나와서 ‘맞아.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는 수준에 왔다. 반드시 ‘원만’ 한 데에 이르러야, 마음이 놓인다(〈中國式管理〉 曾仕強)”   “두 나라 사람을 비교해보면, 한국인은 쓸데없는 이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구할 가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애써 매달리며 모든 일을 너무 진지하게 대한다. 사실 이런 성격은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사람은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장홍지에)”   정부 행위에도 실용이 앞설 때가 있다. 중국의 20여개 성(省)중에는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이 있다. 두 개 성 모두 정확한 알파벳 표기는 shan xi(산 시)다. 산(山, 산)과 섬(陝, 산)은 음의 높낮이가 달라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이들에게는) 발음으로 쉽게 구분이 되지만, 예상할 수 있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모든 영문 표기(예를 들면, 영문 계약서 외에 공항이나 도로 명 등 포함)로는 똑같다(심지어 이 두 개의 성은 이웃해 있다!).     곤란한 문제를 ‘원칙’을 비껴감으로써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후자의 섬서성에는 ‘a’를 하나 더해서 shaanxi(사안시)로 표기했다. 중국어의 발음과 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실용을 따랐다. 성조(음의 높낮이)를 모르는 외국인이 발음해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알아듣는다. 자칫 혼란과 오해를 야기할 수도 있는 ‘원칙의 문제점’을 깔끔하게 해결한다. ‘융통’과 ‘실용’을 중시한 결과일 것이다.    ━  ‘이원대립(二元對立, 흑백논리)’ 과 ‘다원병립(多元竝立, 다양성의 공존)’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무협지를 좋아했다. 주인공만큼 사랑받는 조연급들이 있다. 바로 협객(俠客)과 은사(隱士)다. 협객은 통속적으로 말해서 오지랖이다. 의로운 일이라면 세상의 시시콜콜한 시비에도 뛰어든다. 이와 반대로 은사는 세상을 등지고 산다. 뚜렷하게 상반된 인생관을 가졌지만, 모순적 성향의 두 부류 모두 중국인에게는 우상이요 영웅들이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모두 의리(또는 우정)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협객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을 시도 때도 없이 사귀지만, 은인은 극히 소수의 친구를 가려 사귄다는 것이다.    ‘이원대립’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원대립에서 양극단은 서로 대척점에 있고 멀어져만 간다. 반면 ‘다원병립’의 구조에서는, 양극단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국에는 만난다 (그리고 또 떨어지고, 또 합쳐지는 과정을 반복할 수 있다).   “의협심과 독야청청에는 오히려 유사한 점이 있다. 우정을 그 모든 것보다 중시했다는 점이다. 우정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겼기에 협객들은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은사들은 가볍게 사람을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 (〈이중텐, 중국인을 말하다〉이중텐)”   중국인은 융통성이 크다. 때로는 흑의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그 끝이 흑이 되진 않는다. 백도 마찬가지다. 또한 흑백의 경계가 훨씬 모호하다. 선한 행위와 나쁜 행위의 판단을 보류해야 하는 영역이 넓어진다. 중국인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다른 기준틀이 필요할 것이다(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옳다와 그르다’의 판단에 앞서,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포용적 사고가 필요할 것이다. 바로 흑백의 ‘이원대립’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다원병립’의 사고다    ━  강산은 오히려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뀐다(江山易改 本性難移)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최소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분명하게 표현하는 소통 방식은 서구식이다. 중국은 늘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비튼다. 문화가 서로 다른 이유에 대해서 ‘당연히 원래부터 그런 것’ 은 없다. 중국 사람과 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자연환경과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겠다. 지면 관계상 아주 요약하면, 표의문자인 한자, 서양의 펜과 달리 부드러운 붓, 그리고 종이가 보급되기 전에 사용한 죽편 등이다. 이들은 자세하게 구구절절한 표현을 도구적으로 어렵게 한다.     중국 농업의 특징(계절풍 기후와 노동집약적 농업)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평생을 한 고향에서 보낸다. 이 때문에 ‘조화가 중요하다(和爲貴)’는 당연한 철칙이 되었다. 평생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들끼리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매사를 ‘넘어갈 줄 아는 지혜’가 필수다. 물론, 설화(舌禍, 말을 잘못해서 당하는 화)와 문자옥(文字獄, 글로 인해 당하는 화) 등의 역사적 교훈도 분명 있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면, 중국인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   반대로 분명해 보이는 표현 안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서구식의 ‘직설적 화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  칼을 매우 여유롭게 쓴다(遊刃有餘)   알고 나면, 칼을 씀이 매우 편하다. 칼날 위에서도 자유롭다! 상대방이 변칙적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런 상대는 피곤하다’며 시합을 포기할 순 없다.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내가 입맛에 맞는 상대방을 선택할 수 없다. 큰물로 공격해오면 흙으로 막고, 군대가 오면 장수가 막는다(兵來將擋 水來土掩). 누가 오든 뭐가 오든 우리가 그것에 맞게 준비하면 된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한편, 지구에서 역사적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뿐이다. 이들은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고 있다. 중국을 사랑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잘하자는 것이다. 정말로 잘 지내도 좋지만, 잘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혜롭게 사이 나쁘게’ 지내야 한다. 손절도 때가 있고, 계획이 있어야 한다. 추락하는 증시에서도 손해를 덜 보거나 심지어는 이익을 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아는 현명함(自知之明), ‘너 자신을 알라’는 최고의 경지다. 어렵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내가 몰라도’ 된다. 그렇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리더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 확신에 빠진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2023.09.07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소리 없이 중국에 다가서는 미국과 일본, 한국은?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소리 없이 중국에 다가서는 미국과 일본, 한국은?

    지난해 11월 17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기시다 후미오(왼쪽) 일본 총리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담 기간 양자 회담에 앞서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과 일본이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의 대중 압박에 동참하고 있는 일본과 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중국이 손을 잡았다. 중국과 일본의 외교부 국장이 지난 7월 22일 도쿄에서 만났다. 류진쑹 중국 외교부 아주사(아시아국) 사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오염수(일본은 처리수)의 해양 방류 문제 등을 협의했다고 알려졌다. 이들의 만남 이후 조심스럽게 중‧일 정상회담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시기는 9월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11월 14~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다. 중‧일 정상회담이 흘러나오는 이유는 올해가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45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앞서 일본 다나카 총리, 오히라 외무상, 니카이도 관방장관은 1972년 9월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만나 국교 정상화를 체결했다. 하지만 그 이후 양국의 국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다.   일본은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정권이 붕괴해 국내 정치가 잠깐 불안정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혼란이 수습되기는 했지만, 4인방의 득세,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사망, 4인방의 실각 등 정치적으로 암흑기였다. 중국이 1978년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그해 8월 12일 양국은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바로 1972년 2월 닉슨의 방중이다. 일본에 ‘쇼크’ 그 자체였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 7월 15일 TV 생방송으로 방중 사실을 알렸다. 당시 사토 일본 총리는 닉슨 대통령의 TV 연설이 시작되기 3분 전에 알았다.   후에 총리가 되는 다케시타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하던 중 기자단의 질문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라며 얼버무렸다. 자민당의 나카소네 총무회장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안해하면서 비밀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키신저는 나중에 “공식 발표하기 수 시간 전에 사토에게 미리 전달했더라면 예의에도 어긋나지 않고 친근감도 느끼게 했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의 반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중국과 한 편이 되어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질서 구축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희망과 반대로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됐다. 미국은 이번에는 일본을 동반자로 선택했다.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의 동반자로서 일본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닉슨 쇼크’는 미국이 또다시 일본을 배반하고 중국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일본에 심어주었다. 그것은 일본 외교의 트라우마가 돼 버렸다. 그렇다고 미‧일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본은 ‘독한 마음’을 먹게 됐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독립적인 외교를 추구하기로. 일본은 얼마나 급했던지 곧바로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체결하고 중국과 화해 노선을 걸었다.   최근 일본은 1972년의 ‘닉슨 쇼크’는 아닐지라도 ‘작은 쇼크’를 경험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 등의 잇따른 중국 방문이다.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권력 4위의 국무장관이 방중한 것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까지 방중했다. 성급한 예측일지 모르지만, 미‧중 화해의 신호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지켜보는 일본의 심중은 편치 않다. 미국은 미‧중 화해의 시그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본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닉슨 쇼크’가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외무상 출신인 기시다 총리는 같은 외무상 출신에 총리까지 역임한 오히라 마사요시(1910~1980)를 멘토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 오히라 외무상이 ‘닉슨 쇼크’의 충격을 딛고 중‧일 국교 정상화를 진행했다. 기시다‧오히라는 일본 자민당의 파벌 가운데 하나인 고치가이 출신이다. 오히라와 같은 파벌 출신인 기시다는 ‘닉슨 쇼크’를 트라우마로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별도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고 한다.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겸 중의원 의장은 지난 7월 대기업 임원 80여 명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리창 총리와 왕원타오 상무부장 등을 만났다. 리창 총리가 현직이 아닌 고노 요헤이를 만난 것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중‧일 간에 정치적 갈등은 깊어지더라도 경제 협력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다. 고노 요헤이는 고노 다로 디지털담당상(장관)의 아버지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장관급 인사가 아닌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났다. 방문 목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중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은 지난 10일 한국에 중국인 단체관광을 허용했다. 중국이 이번에 발표한 국가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독일 등 78개국이다. 한미일이 포함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오는 11월 미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미‧중 정상회담까지 예상된다.   미‧일의 중국 접근이 예사롭지 않다. 북‧중 국경 봉쇄도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해제할 전망이다. 동북아시아의 수면 아래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소리 없이 움직이니 외교가 어렵다. ‘전략적 모호성’에서 ‘전략적 명확성’으로 방향을 튼 윤석열 정부가 미‧일의 대중 접근을 예의 주시하며 한국의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기를 바란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2023.09.05 06:00

  • [중국읽기] ‘철없는 아내’의 자랑질

    [중국읽기] ‘철없는 아내’의 자랑질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지난해 7월 일이다. 중국 SNS에 짧은 글이 하나 올랐다. 내용은 이랬다. “우리 남편 올해 29살이야. 그런데 월급 8만2500위안(약 1500만원) 받아. 우리 집 얼마나 부자인지 알겠지?”   자랑질이었다. 그는 소득증명 원본을 찍어 첨부했다. 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 “그 나이에는 월급 5000위안(약 90만원) 받기도 어려운 게 현실인데, 이게 말이 돼? 도대체 어느 회사, 누구야?” 네티즌들은 소득증명서에 있는 회사 직인을 찾았고, 그의 남편이 투자은행(IB)인 CICC(中金公司) 직원이라는 걸 밝혀냈다.   사정 당국의 강력한 반부패 조사, 임금 삭감 등으로 중국 금융 업계가 뒤숭숭하다. [중앙포토] 1995년 설립된 CICC는 ‘중국의 골드만삭스’로 통하는 최고 수준의 IB다. 차이나텔레콤·알리바바 등 굴지의 기업을 중국 국내외 증시에 상장시키기도 했다. 많이 버니 월급도 많다. 지난해 이 회사 직원의 평균 연봉은 약 115만 위안(약 2억원)에 달한다. 남편의 수입은 연봉으로 환산하면 99만 위안으로 회사 평균보다 적었다.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네티즌의 공격에 시장 논리는 금방 허물어졌다. “시진핑(習近平) 정치의 핵심 가치인 공동부유가 왜 금융업계에서는 통하지 않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CICC는 남편을 해고해야 했다. 임금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 주요 증권사들은 지난해 말 임금을 20~30% 스스로 깎았다. 그 많던 보너스도 사라지고 있다.   업계는 ‘자랑질’ 사건 이후 사정 당국의 금융 분야 반부패 조사가 부쩍 늘었다고 보지만, 사실은 더 큰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중국은 지난 3월 국가조직을 개편하면서 당(공산당) 산하에 중앙금융위원회를 신설했다. 행정부(국무원)가 갖고 있던 금융기관(회사) 통합 관리 기능을 당으로 이관했다. 당이 돈 흐름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이다.   당은 근력을 과시한다. 올 상반기에만 고위 금융계 인사 87명이 불려가 부패 관련 조사를 받았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보도하고 있다. 핵심 중간 관리급 직원들은 베이징으로 가 1주일 동안 ‘사상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생들은 시진핑 사상을 읽고 감상문을 써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걸리면 옷 벗어야 한다.’ 업계는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국가의 힘은 점점 시장을 압도한다. IT 플랫폼·부동산 분야의 민영기업을 넘어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투자금융 회사도 그 힘에 빨려간다. ‘철없는 아내’의 자랑질은 그 흐름을 재촉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8.28 00:23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흑룡강이 고향이라는 냉면구이, 카오렁멘(烤冷麵)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흑룡강이 고향이라는 냉면구이, 카오렁멘(烤冷麵)

    중국의 길거리 음식. 셔터스톡 카오렁멘은 요즘 중국의 10~20대 젊은층에서 인기가 높다는 거리음식이다. 원래 동북지방, 특히 흑룡강성 음식이지만 지금은 북경을 비롯해 중국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   카오렁멘이라는 이 음식, 이름이 낯설기 그지없다. 굽는다는 뜻의 고(烤)와 냉면(冷麵)을 합친 단어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니 우리말로는 구운 냉면, 즉 냉면구이가 된다.   얼핏 들어도 일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음식이다. 냉면구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게다가 찬 국수 냉면을 구우면 따뜻한 국수 온면이나 뜨거운 국수 열면이 되니 어법상으로도 도무지 맞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런 괴상한 이름의 음식,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증을 풀어 가다 보면 심심풀이 호기심 천국의 입문을 넘어 최근의 중국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카오렁멘은 어떤 음식일까?   뜻은 냉면구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아는 냉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심지어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맛은커녕 음식 구경도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달궈진 철판 위에 국수를 펼쳐 놓은 후 계란물을 풀어 입힌다. 맛도 맛이지만 계란물이 접착제 역할을 하면서 종이 김처럼 사각형 모양의 국수판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고추장 등을 풀어 만든 소스를 바르고 그 위에 소시지를 비롯해 다양한 재료를 얹은 후 둘둘 말아 굽는다. 그리고 난 후 이 김말이 아닌 국수말이를 숭덩숭덩 썰어 접시나 종이컵에 담아 파는 것이 요즘 중국 야시장에서 유행한다는 냉면구이, 카오렁멘이다. 카오렁멘. 더우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냉면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이 음식을 강사면(鋼絲麵)이라고 불렀다.   강철로 만든 철판 위에 실처럼 생긴 국수를 볶았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일 것이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이 강사면이 냉면구이, 카오렁멘이 됐는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처음 재료로 썼던 국수가 일반 국수가 아닌 감자채(土豆絲) 또는 우리 옛날 함흥냉면처럼 감자 전분 국수를 썼거나 내지는 중국내 조선족의 냉면 국수면발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카오렁멘의 어원은 이렇게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냉면구이라는 이름 못지않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 또 있다. 음식 자체의 유래설이다.   일단 카오렁멘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이 음식, 역사가 길지 않다. 대략 30년 전에 처음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제대로 진행하라고 다그쳤던 1992년의 남순강화(南巡講話)가 나왔을 무렵이다. 다시말해 선언적 의미가 아닌 실질적인 개혁개방이 이제 간신히 시작됐을 때다.    이 무렵 흑룡강성 최북의 계서(鷄西)시 소재 한 중학교 교문 앞 분식집에서 팔았던 음식이 발달해서 지금의 카오렁멘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발상지를 흑룡강성으로 본다는 것인데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럼에도 짚어볼 부분은 있다.   우선 카오렁멘의 조리방식은 여러 면에서 일본이나 홍콩, 대만, 동남아 등지의 철판 볶음국수와 많이 닮았다. 국수가 아닌 밀전병을 둘둘 말아서 먹는 북경의 전통 거리음식인 지앤삥(煎餠) 혹은 파 전병인 총삥(蔥餠)과도 비슷하다. 물론 소로 들어가는 재료의 종류나 소스를 발라서 먹는다는 점 등은 차이가 있지만 굳이 30년 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을 흑룡강성 계서시의 한 중학교 앞 분식집을 발상지로 거론한다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어쨌든 카오렁멘을 포함해 아시아의 상당수 음식이 알고 보면 중국이 원조라는, 속된 말로 국뽕 넘치는 일부의 주장이야 그저 웃어 넘겨버린다고 해도 관련해 또 하나, 특이한 부분이 있다.   요즘 중국에서 새롭게 유행한다는 음식, 그래서 유래설 등의 스토리가 곁들여지는 음식들의 상당수가 흑룡강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즐겨 먹는 찹쌀 탕수육 종류인 꿔바로우(銙包肉)도 그중 하나다. 19세기 말, 흑룡강성 하얼빈에 진출한 러시아 외교관 내지 철도 기술자를 위해 만든 음식이라는 유래설이 널리 퍼져 있다. 최근 보양식으로 뜨고 있다는 비룡탕(飛龍湯)도 몽골과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인 흥안령(興安嶺) 원시림에 사는 희귀 새를 재료로 끓인 청나라의 보양식이라고 한다.   카오렁멘의 발상지라고 하는 계시도 길림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바로 위쪽이고 러시아와의 국경과도 인접해 있다. 지도상으로는 중국에서 한때 청나라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블라디보스톡과도 멀지 않다.   이렇듯 최근 음식 스토리의 진원지로 흑룡강성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배경이 무엇일까? 물론 흑룡강성이 진짜 발상지여서일 수도 있고 또는 중국의 여러 성시 중에서 흑룡강성이 스토리 발굴의 미개척지로 남아 있어 새롭게 떠오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청나라의 옛 땅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의식해 애써 흑룡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북공정과 김치 원조논쟁, 중국의 팽창주의 행태를 보니 음식 하나를 놓고도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3.08.25 06:00

  • [중국읽기] 중국 부동산 시장의 ‘탐욕 카르텔’

    [중국읽기] 중국 부동산 시장의 ‘탐욕 카르텔’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건 1978년, 광둥(廣東)성 순더(順德)의 한 시골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다. 이름은 양궈창(楊國强). 그는 건설 현장을 돌며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였다. 농민공 양궈창이 자기 사업을 시작한 건 1992년. 덩샤오핑이 제2의 개혁개방을 선언했던 바로 그해다.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 회사 비구이위안(碧桂園)은 그렇게 탄생했다.   양궈창의 성공은 ‘345모델’로 상징된다. 공사 시작 3개월 만에 분양을 시작하고, 4개월 만에 분양을 끝내고, 그 돈으로 다시 5개월 안에 다른 땅을 잡아 개발에 나서는 방식이다. 최고의 사업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중국 부동산 시장은 부패와 투기의 카르텔 속에서 성장해 왔다. 상하이의 건설 현장. [중앙포토] ‘탐욕의 카르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 정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이 토지(사용권)를 팔아야 했다. 부패 관료들은 토지 가격을 깎아주고, 아파트를 챙겼다. 분양이 시작되면 투기꾼은 은행 돈으로 아파트 매집한다. 은행은 집값의 70%, 경우에 따라 90%까지 빌려주기도 한다. 그래도 걱정 없다. 집값은 어차피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시장은 냉각됐다. 2020년 시행된 ‘3개 레드라인(개발사 재무 건전성 지침)’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는 무너졌다. 돈의 흐름이 끊기면서 ‘345모델’은 작동하지 않았고, 거꾸로 회사를 파국으로 내몰았다.   탐욕은 끝없다. 비구이위안 CEO인 양후이옌(楊惠姸, 양궈창의 둘째딸)은 지난 7월 말 계열사인 비구이위안서비스(碧桂園服務)의 보유 주식 20%를 궈창(國强)공익기금회에 기부한다. 시가 64억 위안, 우리 돈 1조원이 넘는 규모다. 궈창공익기금회는 양궈창 일가가 홍콩에서 운영하는 자선기금. 시장에서는 “양가(楊家)가 망해가는 회삿돈을 빼돌려 자금을 세탁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없다. “부패와 투기로부터 시장을 구할 테니 소비자들은 힘들어도 참아라”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공동부유의 기치는 더 높게 나부낀다.   비구이위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년 전 위기에 빠진 민영기업 헝다를 보자. 버틸 힘을 소진한 헝다는 보유 자산과 개발 프로젝트를 ‘빅 핸드(정부)’에 넘겨야 할 처지다. 국유화는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시장이 위기에 처했으니) 국가가 나서고 민간은 물러나야 한다.” 시진핑의 중국은 국진민퇴(國進民退) 논리로 주요 민영기업을 하나둘 손에 넣고 있다. 비구이위안 사태를 추동하는 또 다른 로직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8.21 00:42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양귀비 피서법(?) 북경의 언 밤(氷栗子) 언 감(凍枾)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양귀비 피서법(?) 북경의 언 밤(氷栗子) 언 감(凍枾)

    사진 셔터스톡 무더운 여름에 먹으면 좋은, 멋들어진 한식 디저트 중 하나가 언 감이다. 아삭아삭 살얼음이 씹혀 시원하고 상쾌한 데다 달달하면서 품격도 높아 격조 있게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   중국에도 언 과일 샤오츠(小吃)가 있다. 딱히 디저트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식사 마무리를 겸해서 간식으로도 먹기 좋은 얼린 과일이다. 여러 종류가 있지만 눈에 띄는 것이 빙리쯔다. 한여름 북경의 일부 백화점과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다.   빙리쯔라고 하니까 우리나라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제공하는 얼린 과일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완전 다르다. 한국 중화반점의 빙리쯔(氷荔枝)는 얼린 여지로, 우리나라에서는 리치라고도 불리는 아열대 과일이다.   반면 중국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여름 샤오츠로 쌓여있는 빙리쯔(氷栗子)는 삶은 밤을 꽁꽁 얼려 놓은 것이니 냉동 여지와는 발음만 같을 뿐이다. 단단하게 얼린 만큼 삶은 밤 먹듯이 처음부터 깨물어 먹기는 어렵다. 입속에서 살살 굴리며 갉아먹거나 사탕 먹듯이 녹여 먹어야 하는데 이때 서늘한 냉기가 온몸에 퍼지면서 중국 북방의 뜨거운 기운을 가라앉힐 수 있다.   『개원천보유사』라는 옛 문헌을 보면 당나라 때 양귀비가 여름에 옥을 깎아 만든 물고기를 입에 물고 그 찬 기운으로 땀을 식혔다는 함옥연진(含玉嚥津)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양귀비가 느꼈을 시원함이 빙리쯔 먹을 때와 비슷했을 것 같다.   그런데 중국 수퍼마켓에서 언 밤, 빙리쯔에는 다소 의아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평소 음료수는 물론이고 음식도 찬 것을 싫어해 찬 국수(凉麵)조차도 우리 기준으로는 미지근하고 심지어 맥주와 콜라까지도 차게 마시는 중국 사람들인데 왜 꽁꽁 얼린 밤을 먹을까 싶기 때문이다.   견문이 짧은 탓인지 중국 현지에서 직접 목격한 여름철의 얼린 과일은 빙리쯔가 거의 유일했기에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였다. 찬 음식을 먹지 않는 지금과 달리 옛날 중국에는 얼린 과일을 먹은 역사도 깊고 종류도 다양했다. 심지어 언 과일이 양생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언 감(凍枾)과 언 배(凍梨) 언 능금(凍花紅)은 보물과도 같은 언 과일 3종 세트(凍果三寶)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중 언 감의 경우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디저트 등으로 자주 먹으니 중국 풍속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싶다.   우리한테는 지금 언 감이 디저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중국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양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에 북경에서는 정월에 언 감 30개를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고 한다. 언 감 하나 놓고 웬 양생 타령인가 싶어 뜬금이 없지만 이런 속설이 생긴 데는 여러 배경이 있다.   일단 옛날 북경은 감이 유명했다. 서남쪽의 명승지 십도(十渡) 같은 지역은 감의 특산지다. 감이 맛있고 산출량도 많으니 겨울에 언 감이 많이 생겼다. 그러니 이를 소비하기 위해 생겨난 풍속일 수 있다. 그렇기에 옛날 북경 사람들은 『본초강목』까지 인용해 가면서 예찬론을 펼쳤다. 감은 성질이 차기에 열을 내려주고 식욕을 북돋워 주며 폐를 보강해 기침을 멎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겨울이 춥고 건조한 북경에서 매일 언 감 하나씩을 먹으면 겨울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에 언 감을 먹는 지금의 우리와는 정반대인 것 같아 재미있지만 어쨌든 언 감이 단순한 디저트 이상이라니 흥미롭다.   상징적 의미도 있다. 감에는 행운이 따르고 상서로운 길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으니 옛 동양의 공통된 민속이다.   감은 표면이 매끄럽고 둥글다. 이런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가족의 화합과 단란함(團圓)을 상징하고 태양처럼 붉은 감색은 활기차고 번창함(紅紅火火)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감의 한자인 시(枾)는 중국어로 일 사(事)와 발음이 같기에 만사여의(事事如意)의 뜻이 있으니 감을 먹으며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기를 빌었다.   우리는 요즘 얼린 홍시를 디저트로 많이 먹지만 옛날에는 빙리(氷梨), 동리(凍梨)라고 부른 언 배가 인기가 높았다. 한·중·일 삼국의 공통된 음식문화로 언 배가 맛도 있지만 먹으면 신선 세계의 과일처럼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보관 잘못했다며 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장수 운운하며 예찬을 펼친 것을 보면 배가 얼면서 당도가 훨씬 높아지는 데다 무엇보다 신선한 과일이 없었던 겨울이었기에 신선 세계의 과일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옛사람들이 이렇게 언 과일에 환상을 품었던 이유는 드물면 귀하다(物稀爲貴)는 경제원칙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비슷했지만 중국의 경우 동북지방은 겨울이 너무나 춥기에 아무리 잘 보관해도 식품이 얼게 마련이다. 신선한 과일은 떨어지고 남은 것은 얼어붙은 과일밖에 없기에 먹었던 것인데 의외로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냉동보관이 미생물의 번식을 막아 영양분이 그대로 보존돼 동북지역의 특산물이 됐다는 것이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3.08.18 06:00

  •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우리나라도 ‘꽌시’ 사회다!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우리나라도 ‘꽌시’ 사회다!

    셔터스톡 우리는 중국과 많이 다른가?   ■ 美美與共 天下大同 「 ‘우리’의 아름다움과 ‘타인’의 아름다움을 함께 하면, 천하는 크게 하나가 된다. -중국 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 」  서로 다른 문화를 서로가 공감하면, 세계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을 것이다.   첫 칼럼을 쓰고 나니 어떤 이는 ‘중국인 중에도 좋은 이가 있고 나쁜 이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도 그렇다’는 식의 시시한 얘기 하려면 그만두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왜 시시한 얘기일까? 어느 나라 사람은 모두 맞고 어느 나라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누구는 늘 옳고, 누구는 늘 틀릴 수도 없다.     1992년, 대만과 단교(斷交)하자 대만에 있던 많은 한국인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대만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한국인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나쁠 때, 일본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과 일제 차량을 부수는 폭력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의 주범으로 잡혀간 어느 중국인이 형을 마치고 출소했더니 주위에서 위로를 해줬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고생한 것 없다. 감방의 모든 사람이 너무 잘 대해줘서 어리둥절했다”라는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일본을 상대로 분풀이한 것에 대해 감방의 모든 이들이 칭송(?)한 것이다.     ‘최소한 아직은’ 사드 이후 지속되는 이런저런 양국의 갈등 중에도 중국에서 한국인이 구타당했다거나, 우리나라 차량 등 제품이 훼손당했다거나,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중국에 대한 평가를, 필자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전방위적인 반중 현상은 정도가 지나치다. 특히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편향된 정도가 심각하다. 나쁜 중국인(혹은 기업)한테 속은 우리나라 사람(혹은 기업)도 많지만, 나쁜 우리나라 사람한테 속은 중국인도 많다. 균형감 있는 비판은 몰라도, 흥밋거리로 소비하려는 비난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당연히 공평하지도 않다.     취향(혹은 성향)은 ‘선택’에는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판단’에 이르면 안 된다. ‘좋아한다’와 ‘싫어한다’는 성향이고 취향일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맞다 또는 틀리다’ 혹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당신 자신의 그 근거에 대한 넉넉한 증거를 추구한다면, 당신의 의심이라는 것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다지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부족으로 인한 편견이자 오만이다(티머시 켈러 목사)”.    ━  학문적 결과물도 때로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지 않다.   심리학의 ‘기본 귀인 오류(基本歸因誤謬)’는 최소한 중국인에게는 없는 오류다.   사회심리학에서 중요한 주장 한 가지는,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평가할 때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의 중요성은 과장하는 한편, ‘상황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를 ‘기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른다. ‘개인의 성향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일 뿐, 주변 환경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즉,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지적하는 ‘기본 귀인 오류’는 중국인에게는 아예 성립이 안 되는 듯싶다. 중국인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주변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를 소개해본다.  ━  살해 사건에 대한, 미국과 중국 매체의 분석     ■ 사례1: 중국인이 가해자 「 루깡이라는 중국인 미국 유학생의 사례다. “1991년 미국 아이오아 대학 물리학과 박사 과정에 있던 중국인 학생 루깡은 우수 논문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다. 그는 즉각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그는 교수직을 얻는 데도 실패했다. 그해 10월 31일, 그는 학과 건물에 들어가서 자신의 지도교수를 총으로 쏘고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한 후 결국 자살했다…. 동일한 살인 사건에 대해 미국 신문(뉴욕 타임스)은 범인의 인격적인 결함을 부각하는 보도를 했다. 반면에, 중국 신문(월드 저널)은 범인이 처했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미국과 중국 매체의 초점은 명백하게 달랐다. 미국 언론은 ‘개인의 인격적 결함’을 부각하려 했다. 중국 언론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하필 범인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두 매체가 각각 의도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언론의 태도는 상대 국가에 대한 선입관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본래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문화가 달라서 ‘상대 국가에 대한 편견’이 없는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   ■ 사례 2 : 미국인이 가해자  「 두 번째의 사례는 ‘편견’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차이’가 그렇게 판단하도록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번에는 가해자가 미국인이었다.   “미시간주의 오크벨리라는 도시에서 우편배달부로 일하던 토머스 매킬베인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자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해 11월 14일, 그는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에 들어가 상사와 동료, 그리고 고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신문 기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가해자의 내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중국 매체는 매킬베인에게 영향을 주었을 법한 상황적 요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   ━  미국인과 중국인의 사고방식, 달라도 아주 다르다.   한편, ‘만약 이러저러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사후 가정적(counterfactual) 질문을 던졌을 때 더욱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루깡이 직장을 잡았더라면’ 혹은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그와 주변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더라면’ 등등 “그를 둘러싼 환경이 달랐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중국 학생들은 “루깡의 상황이 달랐더라면 살인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미국 학생들은 “살인 사건의 원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 사람의 내부적 특성 때문인 만큼 상황이 달랐어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개인주의’의 상대 개념은 ‘집단주의’가 아니라 ‘관계주의’다.   인과적 설명에서 양국의 차이가 극명했다. 개인은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을 가졌다고 전제하는 미국은 ‘개인주의’인 반면, 중국은 소위 ‘관계(꽌시)주의’ 다. 개인은 여러 환경 속에서(또는 관계 속에서) 관계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저명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쑤어밍(梁漱溟)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 사회는 ‘개인주의’도 아니고…바로 ‘관계주의’다. 관계주의의 사회 시스템에서 강조하는 중점은 주로 특수한 개체 간의 관계에 있다…. 중점은 어느 한쪽에 두지 않고, 그 관계로부터 오는데, 피차가 서로 교환한다. 그 중점은 사실상 관계에 두고 있다(『중국문화요의(要義)』)”.   한편, 한국인과 미국인의 비교도 있다. “어떤 사람의 성격은 고유한 영역으로 살아가는 동안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미국인들은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는 반응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였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  “중국은 꽌시 사회다. 그래서 정의롭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관계를 겪어 내는 여정입니다. 문제는 풀지 못해도 살 수 있지만, 관계는 견디지 못하면 못 삽니다(『길을 찾는 사람』, 조정민 목사)”.   “심리학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가족확장성과 관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는 조직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즉, 집단주의보다는 관계주의다…. 고 최상진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심리적 도구까지 발전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체면이다’… (『어쩌다 한국인』, 하태균)”.  ━  ‘전면적인 꽌시 사회’ 와 ‘(일부 특권층만 향유하는) 부분적인 꽌시 사회’     중국은 스스로 ‘꽌시 주의’라 정의하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중국이 ‘가족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꽌시 주의 문화’라고 여기고 있지만, 권위 있는 학자는 ‘우리나라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한편, 보통의 한국인은 우리 사회의 꽌시 문화를 부정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꽌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인가 싶다. 일부 사회적 강자와 권력층은 자기들끼리는 꽌시를 거리낌 없이 자주 활용한다. 꽌시가 있는 이들은 법조차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에게 법은 검이요 방패다. 꽌시 없는 보통의 한국인들은 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꽌시 있는 이들의 검과 방패는 평범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방패는 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칼날은 결국 대중을 향한다.    ━  양쪽에서 배척당할 것인가? 아니면 양쪽을 다 아우를 것인가?   우리는 ‘주변인(혹은 경계인. Marginal man)’이다. 주변인 혹은 경계인이란, “두 개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어 있지 못한 사람(〈두산 백과〉)”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한쪽으로의 뚜렷한 특징이 없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태생적으로 ‘양쪽을 다 잘 아는’ 부류다.     세계적인 석학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명 이만열)의 글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유교 국가면서도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은 매우 이질적이고 상충하는 가치가 공존해왔고 앞으로도 공존할 수 있는 특이한 곳이다(『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우리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서구의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알 수 있다. 한편, 근대화 이후 교육 및 정치 사회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서구를 쫓아가고 있다. 서구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크게 보면 두 국가 혹은 진영 사이에서의 ‘주변인’이다. 그런데 현실은, 미국과 중국을 어느 한쪽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듯 보이고,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지도 못한 듯하다.     한쪽의 잣대로 다른 한쪽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양쪽을 다 잘 아는 주변인’의 장점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이 몇 문인가?’만 확인하고 사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직접 신어 보고, 내 발이 편한지를 알고 사야 한다. ‘신발의 단위’보다 내 판단이 내 감각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寧信度 不自信(크기를 재는 도구는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지 않는다). 그러면, 어리석다. ‘주변인의 장점’을 발휘해서 미국은 미국식으로 바라보고, 중국은 중국식으로 바라보자. 누구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양쪽 시력이 똑같이 좋은데, 굳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2023.08.17 06:00

  •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규제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규제

    사진 셔터스톡 중국 국가사이버공간관리국(Cyberspace Administration of China)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교육부, 과학기술부, 공업정보화부, 공안부, 국가전파관리국과 함께 올해 8월 15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생성적 인공지능 서비스 관리를 위한 임시 조치(生成式人工智能服务管理暂行办法)를 발표하였다(2023. 7. 13). 이제 중국은 생성 인공지능 규제를 시행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공안부 등 이번 조치안에 참여한 기관들의 면면에서, 중국이 생성 인공지능을 산업적 측면은 물론 안보적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 인터넷을 대내외적 프로파간다 활동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이 생성 인공지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사회주의 핵심 가치의 견지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관련 조치안이 영미권의 규제 논의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대목은 ‘사회주의 핵심 가치의 견지’이다. 총칙 4조 1항은 ‘사회주의 핵심 가치를 견지하고 국가권력 전복, 사회주의 제도 전복, 국가 안보와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선동, 국가 이미지 손상, 국가 통합과 사회 안정 저해, 테러 조장을 유발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다. 즉 생성 인공지능에 대한 임시조치는 중국이 언제나 강조하는 총체적 국가 안보관을 반영한 것으로, 체제 안정과 외부 영향 차단이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 운용의 일차적 고려 요소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국가 안보와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선동을 금지함은 사실상 외부 세계 콘텐츠의 흐름을 억제하고 내부적으로도 검열과 통제를 시행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상이한 가치관과 거버넌스는 결국 중국의 인터넷이 외부, 특히 서방과 더욱 단절될 것임을 전망하게 한다. 이러한 전망은 동 조치안의 7조 5항이 생성 인공지능 제공자로 하여금 네트워크 보안법, 데이터 보안법, 개인정보보호법과 같은 법률의 규제 요건을 준수해야 함을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데이터 보안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은 안보 개념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다. 데이터 보안법은 중국 경내나 해외 데이터 처리를 막론하고 공안기관이 데이터를 수집할 경우 모든 조직과 개인에 협조 의무를 부여한다. 개인정보보호법도 정부가 중국 내외(內外)의 모든 중국인의 개인 정보에 접근‧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즉,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 제공자도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서비스에 제공되는 콘텐츠나 해당 콘텐츠 생성에 관여한 기관, 개인을 언제라도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상이한 생성 인공지능 거버넌스를 채택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거버넌스를 자신들의 서비스에 대한 제약 및 자국에 대한 영향 공작(influence operation)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어, 서방과 중국 인터넷의 분리‧단절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주목할 내용은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별 차별 규제이다. 동 임시조치안의 4조 5항은 ‘서비스 유형의 특성에 따라 생성적 인공지능 서비스의 투명성을 높이고 생성된 콘텐츠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 서비스 유형 및 그 특성은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16조에서 관련 국가 당국이 분류 및 감독 지침을 제정하도록 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있어 추후 관련 당국의 지침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현 단계에서는 관련 당국이 누구인가가 중요한데 네트워크 보안이나 교육, 과학, 특히 미디어 및 공안 당국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일부 중요 서비스는 허가를 취득해야 하고(23조),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시정을 거부하거나 상황이 심각한 경우 관련 서비스 제공을 중단하도록 하고 있다(21조).    ━  인공지능 세계의 분리     한편,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콘텐츠가 중국 당국의 의도를 반영해 외부 세계로 투사될 수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조치안의 제17조는 생성 인공지능 서비스 제공자가 인터넷 정보 서비스 알고리즘 권장 관리 규정에 따라 알고리즘 제출, 수정, 취소 절차를 수행하도록 규정한다. 즉, 콘텐츠 제공의 핵심 수단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도록 한다. 수단의 통제는 서비스가 제공하는 콘텐츠의 내용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생성 인공지능이 중국이 의도하는 선동 내지는 메시지, 담론의 설파에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서비스 제공의 대상이 중국인이 아니라면 이번 조치안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중국이 미디어, 특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한 영향 공작이 가능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중국의 생성 인공지능 관련 조치안은 안보 측면, 이야기 전쟁의 측면에서 방어와 공격이 모두 가능한 생성 인공지능 거버넌스의 골격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알고리즘 통제는 단순히 데이터를 자국내(內)에 두는 것으로는 안보 측면을 담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서방 세계에서는 인공지능의 위험 수준에 따라 차등적 규제를 추진하는 EU나 자율규제를 선호하는 미국간의 인공지능 관련 정책 조율이 무역기술위원회(TTC)를 통하여 진행 중이다. 민간 기업의 입장에서는 규제와 혁신 간의 조화가 어떤 모습으로 제도적으로 나타날 것인지가 관심사일 것이지만 사실상 미국과 유럽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시장 규제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미국과 EU가 모두 인공지능의 규범에서 민주주의 및 인간의 기본권을 중심 가치로 두면서, 일반 시민의 행위를 평가해 이익 또는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사회신용시스템(social credit system)과 같은 서비스의 제약을 추진할 전망이다. 이는 중국의 인공지능 서비스에 대한 제약으로 작용할 것이고, 중국도 서방의 인공지능 서비스가 자국민에게 제공되는 것을 이번 조치안을 통해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의 혁신이 진행되고 콘텐츠 생성이 용이해질 수록 중국과 서방의 인공지능 서비스는 분리되고, 상대방의 정보나 선전활동에 대한 양 진영의 대응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추세에 대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보나 콘텐츠의 자유로운 생성과 유통은 상대방에 대한 왜곡과 거짓을 이용한 공격의 자유도 부여하기 때문이다.   최계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3.08.15 06:00

  • [중국읽기] 돌아온 중국 유커 ‘인두세’의 기억

    [중국읽기] 돌아온 중국 유커 ‘인두세’의 기억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당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달 초 A여행사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의 현지 여행사로부터 20명의 단체 여행객을 받았다. 4박 5일 서울~제주 일정이었다. 여행상품 가격은 900위안, 우리 돈 16만2000원이다. 하얼빈~서울 왕복 비행기 푯값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두세(人頭稅) 때문이다. 정상대로라면 A여행사는 하얼빈의 중국 여행사로부터 숙박·식사·교통 등의 관광 비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거꾸로다. A사는 오히려 유커 1명당 300위안(약 5만4000원)을 중국 여행사에 줘야 했다. 돈을 주고 유커를 사 오는 셈이다. 그다음부터는 뻔한 일, 덤핑관광은 그렇게 시작된다.”   유커가 쏟아져 들어오던 2016년 가을 명동. 중국 관광객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중앙포토] 2016년 3월 16일자 본지 기사다. ‘중국 관광객 한 명당 5만원…. 현대판 인두세’라는 제목이 붙었다.   중국이 한국 단체 관광에 ‘금족령’을 내리기 전의 풍경이다. 당시 유커(遊客)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덤핑 관광이 기승을 부렸다. 가이드는 관광객을 새벽부터 쇼핑센터로 내몰았다. 쇼핑하지 않는 관광객의 짐은 내던져지기 일쑤였다.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라는 엉터리 가이드도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였다. 업계는 어떻게 하면 어설픈 중국 관광객 주머니를 털까만을 생각했다. 국내 여행사들은 중국 여행사 농간에 놀아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덤핑 판매에 나섰다. 시장을 관리해야 할 공무원들은 보고용 관광객 숫자에만 관심을 뒀다. ‘인두세’가 형성된 배경이다.   중국이 6년여 동안 묶었던 한국행 단체관광을 다시 허용키로 했다. 호텔·면세점·백화점·항공 등 관련 업계는 벌써 다가올 특수에 흥분한다. 그러나 우려가 앞선다. 덤핑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인두세’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당국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담 여행사의 허가 주기를 1년으로 단축하고, 덤핑 여행사 상시 퇴출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가이드 제도도 손볼 요량이었다. 일부 여행사의 불법 환전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드로 유커가 사라지면서 유야무야 됐을 뿐이다.   당시 대책만이라도 살려야 한다. 덤핑 구조는 한국 관광산업도, 이미지도 실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반중(反中) 정서가 높다. 왜곡된 유커 관광은 내국인과의 마찰로 이어져 불필요한 감정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인두세’ 형성 구조를 해체하는 것, 그게 유커 맞이의 시작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8.14 00:34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뚜껑 열린 딤섬 만두, 사오마이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뚜껑 열린 딤섬 만두, 사오마이

    사진 셔터스톡   사오마이는 딤섬의 대표 만두 중 하나다. 맛도 있지만 모양도 예뻐서 많은 사랑을 받는데 그래서 홍콩의 딤섬을 세계적으로 알린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서도 일반 음식점보다는 딤섬 전문점에서 주로 먹을 수 있기에 흔히 광동요리로 알려져 있다. 여느 중국 음식과는 다르게 만두 속에 새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 북경을 비롯한 화북, 상해, 항주 등지의 화동 음식과는 다른 느낌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중국의 다른 만두와 사오마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만두 끝이 오무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만두는 소를 싼 만두피의 끝을 봉합하지만 사오마이 만큼은 예외다. 쉽게 말해 만두 뚜껑이 열려 있다는 것인데 덕분에 만두소로 무엇이 들었는지, 새우인지 고기 혹은 야채만두인지, 고기만두라면 돼지고기인지 양고기인지를 먹어보지 않고도 구분할 수 있다. 사오마이라는 만두, 왜 뚜껑이 열렸을까?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만두소의 내용물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만두 빚을 때 미리 구분해 놓으면 되고, 그게 아니어도 만두소가 무엇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특정인에게는 심각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중국에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다. 그중 이슬람 전통의 회족, 위구르 민족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많은 경우 공산화된 현재 중국에서도 율법에 따라 조리한 할랄음식(淸眞菜)을 고집한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이 아니어도 돼지고기를 기피하는 유목 전통의 민족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자칫 한족이 주로 먹는 돼지고기 만두를 잘못 먹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뚜껑 열린 만두, 사오마이를 빚게 됐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속설이지만 당연히 근거는 없다. 다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래서 팩트 체크를 해보면 사오마이가 유행하는 과정을 통해 중국의 역사와 시대상황도 엿볼 수 있다.   먼저 중국에서 사오마이를 먹기 시작한 시기다. 일반적으로는 문헌 기록을 토대로 몽골이 중원을 지배했던 원나라 무렵으로 본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오마이라는 만두 이름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중국이 아닌 우리 문헌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원말명초, 우리의 고려 말에 간행된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朴通事)』의 예문에 처음 나온다.     원나라 수도였던 대도(大都)에서 상인들이 음식을 사먹는 장면으로 여기에 양고기 만두(羊肉餡 饅頭)와 지금의 물만두로 추정되는 수정교자(水精角兒), 채소 사오마이(素酸餡 稍麥) 등등 다양한 만두 가 소개돼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은 상업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였다. 흔히 몽골족을 초원에서 양과 말이나 키웠던 부족으로 알지만 이들은 농경민인 한족과 달리 교역을 통해 생필품을 구해야 했던 상인들이었다. 그런만큼 원나라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교통망을 바탕으로 상업이 번창했는데 그 근거지가 역참이다. 원나라 문헌 『경세대전』의 역참 조항 등을 근거로 당시 중국에는 약 1500개의 역참이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보통 40Km마다 역참이 있다고 나온다. 역참은 군사 교통로이면서 동시에 상인들의 이동 길목이었기에 역참을 중심으로 숙박시설, 그리고 음식점이 발달했고 거대한 상업도시가 형성됐다.     이를 테면 수도인 대도의 상주인구은 약 50만 명이었지만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거주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이 머물고 먹어야 했기에 곳곳에 숙박과 음식점을 겸한 반점(飯店) 술집과 숙박업소인 주루(酒樓), 차와 함께 만두 등 가벼운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찻집(茶館)이 생겨났다.     대도뿐만 아니라 당시 중부와 남부의 대표 도시인 개봉과 항주도 마찬가지여서 대형 주루만 70여곳이고 반점은 부지기수였다니 상업과 요식 숙박업이 얼마나 번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런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주로 지배층인 몽골 상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무슬림인 색목인(色目人)이었고 이들은 종교적, 관습적으로 돼지고기 등을 기피하는 사람들이었다. 먹기 전 만두 소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뚜껑 없는 만두 사오마이가 유행했다는 속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다.     어원을 통해 사오마이의 뿌리를 찾기도 한다. 원나라 때는 사오마이를 한자로 초맥(稍麥), 명청시대 이후는 소매(燒賣)라고 쓴다. 중국어 발음은 모두 사오마이(shaomai)다.     그런데 초맥은 끝 초(稍) 보리 맥(麥)이니 끝 보리(?)라는 뜻이 되고 소매는 태울 소(燒) 팔 매(賣)로 태워서 판다(?)라는 뜻 모를 단어가 된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이름이 됐을까 싶은데 일부에서는 북방 혹은 서역의 외국어를 한자음을 빌어 번역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사오마이는 홍콩, 광동요리가 아닌 원나라 때 음식점을 드나들던 북방 서역의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서역과 연결된 실크로드, 현대에는 영국이 발전시킨 홍콩을 통해 유명해진 뚜껑 열린 만두 사오마이 속에 고금의 동서교역 역사가 들어있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2023.08.11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정은은 왜 시진핑이 보낸 중국 대표단에 실망했나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정은은 왜 시진핑이 보낸 중국 대표단에 실망했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인 지난 27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왼쪽), 리훙중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등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일(북한은 전승절) 기념행사에 중국의 대표단장으로 리훙중 정치국 위원을 보낸 것은 실수였을까? 우연일까?   이번 정전협정일이 70주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이 참석할 만도 했다. 그런데 정치국 위원에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한국의 국회 부의장 격)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시진핑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조금 서운했을 만도 하다.   김정은은 지금 북한 주민들 앞에서 체면을 살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숨 막힐 정도로 어려운 경제 사정을 해결하지 못해서인지 열병식장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그런 그에게 절박한 것은 뭉개진 체면을 세워줄 사람이다. 시진핑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   리훙중은 그런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리훙중은 중국 정치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시진핑의 충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종교가 ‘시진핑 사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출신으로 선전시 서기, 톈진시 서기 등을 거친 시진핑 이후 거론되는 잠룡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경력이 중국에서 통할지 모르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아니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사람은 김정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북한 주민에게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리훙중의 방북을 공개한 것은 중국 외교부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다. 당 대 당 외교를 중시하는 북‧중 관계의 특수성이 드러난 대목이다. 대외연락부가 방북하는 중국 대표단장을 추천하고 시진핑이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유인지 김정은은 지난 7월 28일 리훙중을 포함한 중국 대표단(8명)과 접견하는 자리에 통역만 데리고 혼자 그들을 만났다. 북한에서 중국을 상대하는 최선희 외무상이나 김성남 조선노동당 국제부장도 배석시키지 않았다. 이날 접견을 보도한 중국 신화통신사의 기사를 읽어보면 김정은-리훙중 대화는 지난 70년 동안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수준이었다.   김정은이 실무자를 배석시키지 않은 것에 숨은 의도가 있다. 한마디로 의례적인 방북으로 판단한 것이다. 북‧중 정상회담 등 굵직한 현안을 다룰 대표단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리훙중과 함께 참석한 궈예저우 대외연락부 부부장,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 진궈웨이 랴오닝성 부성장 등 면면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김정은-리훙중 단독회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김정은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는 단독회담을 하기도 했다. 시진핑이 류젠차오 대외연락부장을 함께 보냈으면 김정은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정은은 혼자 그들을 상대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정은은 이번 정전협정일 행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지난 7월 25일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참배했다. 이를 두고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김정은 동지가 참배한 것은 조선노동당과 정부, 인민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위대한 업적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닝의 의례적인 설명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지만, 중국은 김정은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오닝의 논평을 뒤로 하고 김정은의 참배에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대동한 사람들이다. 조용원 정치국 상무위원‧강순남 국방상‧최선희 외무상‧김성남 당 국제부장‧김여정 당 부부장 등 딱 5명이다. 북한의 군사‧안보‧외교‧통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다.   조용원은 노동당 조직비서‧조직지도부장을 겸직할 정도로 북한의 모든 인사를 담당하고 있다. 김정은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다. 강순남과 최선희는 맡은 직책에서 그들의 역할을 알 수 있다. 김성남은 김일성‧김정일의 중국 통역을 오랫동안 맡은 중국통이다. 김여정은 남북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들을 데리고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간 것은 중국에 대한 각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그들에게 말하려고 한 것은 지금 북한이 쳐다볼 곳은 중국이라는 것이다.  싫든 좋든 어쩔 수 없다는 뜻도 담겨 있다. 비록 중국에 섭섭한 점이 한둘이 아닐지라도 그러지 말라는 시그널이다.   북한은 이에 앞서 북‧중 우호의 상징인 ‘조중우의탑’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지난 6월 28일 대대적인 기념행사도 했다. 그 자리는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도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최 위원장 외에 주창일 당 선전선동부장, 전승국 내각 부총리, 임경재 도시경영상 등이 함께 했다. 북한이 중국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중국은 왕야쥔 대사가 참석하는 정도였다.   이처럼 김정은은 이번 정전협정일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에 러브콜을 보냈다. 그래서 중국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보다.   중국은 지금 미국을 쳐다보고 있다. 북한이 아니다. 최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등의 방중으로 미‧중 관계가 겨우 숨통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오는 9월 인도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11월 미국에서 열리는 APEC 총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앞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중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북‧중 관계보다 미‧중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따라서 시진핑은 김정은의 체면에 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조급하기는 김정은과 시진핑이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중국에, 시진핑은 미국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가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과거 김일성이 중‧소 사이에서 줄타기한 것이 재연되는 것이다. 오는 18일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9월부터 큰 국제행사 속에서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런 큰 흐름이 한반도에 새로운 변화가 오려나.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2023.08.08 06:00

  • [중국읽기] 새장에 갇힌 ‘56789 경제’

    [중국읽기] 새장에 갇힌 ‘56789 경제’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상하이에서 IT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중국인 친구가 왔다. 코로나19로 못 만난 지 4년여 만이다. “요즘 비즈니스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100명 넘던 직원을 40명으로 줄였다”고 답했다.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단다. 친구는 “국유기업 쪽만 잘 나가…”라고 덧붙였다. 그의 표정에서 중국 민영기업의 현실을 읽게 된다.   수치가 보여준다. 상반기 중국 국유기업의 고정자산 투자는 8.1% 증가했다. 그런데 민영기업은 오히려 0.2% 줄었다. 민영기업이 새로운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국에 ‘56789 경제’라는 말이 있다. 민영기업이 전체 세수의 50%, GDP의 60%, 혁신 기술의 70%, 도시 고용의 80%, 기업 수의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위축됐는데 경제가 잘 풀릴 리 없다.   ‘창업도 당과 함께!’ 광둥성 선전(深圳)의 한 창업센터 로비에 설치된 구조물. [중앙포토] ‘새장 경제(鳥籠經濟)’라는 말도 있다. 새를 새장에 가둬 키우듯, 민영기업은 국가가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기업관이다. 개혁개방은 새장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덕택에 민영기업은 더 자유롭게 활동했고, ‘56789’를 실현했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에는 달랐다. 새장은 오히려 촘촘하고, 좁아졌다. 2017년 이후 중국은 회사 내 당 조직을 빠짐없이 건설하도록 민영기업을 압박했다. 종업원들은 CEO(최고경영자)의 지시도 따라야 하고, 당 지부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2중 명령체계다. 그런가 하면 국가는 소액 지분을 사들여 이사회에 참석하고, 경영에 간섭한다. IT 기업에서 특히 심했다.   “중국 금융에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2020년 11월 말 알리바바 총수 마윈(馬云)은 중국 금융의 취약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는 새가 새장을 찢고 날아가려는 몸짓으로 해석됐다. 후과는 가혹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진행되던 마윈의 앤트그룹 상장은 무산됐다. 알리바바·텐센트 등 빅 테크 기업 규제가 표면화한 것도 그때부터다. IT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자리는 사라졌고, 청년실업률은 높아졌다.   중국 정부는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등의 민간 부양책을 최근 발표했다. 새장을 넓혀주겠다는 거다. 상하이 친구는 “회복되더라도 이전의 활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3~4년 이어진 규제로 IT 생태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혁신을 해도 결국 새장일 뿐”이라는 체제의 한계를 실감한 중국의 청년 기업가는 여전히 날개를 접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8.07 00:44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독충에서 미식으로…해파리냉채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독충에서 미식으로…해파리냉채

    해파리냉채. 사진 掌酷美食 여름에 먹기 좋은 중국 음식 중 하나가 해파리냉채(凉拌海蜇皮)다. 냉채라는 요리 이름처럼 시원해서 좋고 오돌도돌 씹히는 해파리의 식감에 오이를 비롯한 갖가지 채소가 어우러진 상쾌한 맛, 코끝을 톡 쏘는 겨자 소스의 자극까지, 더위에 지친 입맛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해파리냉채, 좀 특이한 구석이 있다. 중국에서는 해파리를 독침 철(蜇)자를 써서 바다의 독침이라는 뜻으로 하이저(海蜇)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해파리는 피부에 조금만 스쳐도 살갗이 부어오를 만큼 독성이 강하다. 이런 해파리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 생각을 했을까?   물론 식용 해파리는 인체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 상에 존재하는 200여 종의 해파리 중 식용은 불과 10여 종에 불과하다. 수많은 해파리 중에서 식용 해파리를 골라 음식으로 발전시킨 옛사람들의 안목이 놀라운데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음식문화를 알면 흥미로운 사실 또한 한둘이 아니다.   우리와는 달리 중국에서 해파리냉채는 특별한 음식이다. 특히 춘절 새해 음식(年菜)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명절에 챙겨 먹는 잡채 비슷하다. 중국 전역의 공통된 풍속은 아니고 상해와 절강 등 바닷가에 인접한 화동 지역의 명절 음식문화다.   춘절 해파리냉채가 다소 뜬금없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맛도 맛이지만 해파리에 각종 채소를 곁들이면 다양한 색을 낼 수 있기에 명절 상차림이 돋보이는 효과가 있다.   인문학적 배경도 있다. 질 좋은 말린 해파리를 요리하면 색이 노랗고 윤기가 돌아 마치 황금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금 좋아하는 중국인들, 새해 해파리냉채를 먹으며 부자 되기를 소원한다.    북경 등지에서 새해 부자 되라는 뜻으로 춘절 식탁에 잉어요리를 차리고 상해 등지에서 조기탕수육 등을 준비하는 것과 닮았다. 잉어(鯉魚)는 중국어 발음이 이익(利益)과 비슷하기에 돈 많이 벌라는 뜻이 있고 조기(黃魚)는 비늘이 금빛인데 중국어 이름 역시 황금과 연결되니 금이 들어오는 것과 같아 풍요의 상징 음식이 됐다. 해파리냉채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해파리냉채가 춘절 음식이 됐다는 것은 이유가 어떻든 그만큼 특별한 요리였기 때문이겠는데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해파리를 먹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특이하기는 하지만 고급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말린 해파리가 어떻게 특별한 명절 음식, 잔치 음식이 된 것일까?   중국에서 해파리를 먹은 역사는 꽤 오래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3세기 말, 진(晉)나라 때 장화가 쓴 『박물지』에 식용 기록이 보이니 대략 1700년 전부터다. 박물지의 특이한 물고기(異魚)편에 “동해에는 피를 뭉쳐놓은 것 같은 물체가 있다”면서 “현지 사람들은 이를 끓여 먹는다”고 적었다. 해파리에 관한 기록인데 중국에서 동해라고 했으니 아마 우리 서해쯤이 아닐까 싶다.    당나라 문헌에도 남쪽 사람들은 해파리를 식용으로 먹는다고 했는데 문헌 기록으로 보면 처음에는 머나먼 바닷가 마을에서 먹는 특이한 해산물로 여겼을 뿐 장안이나 낙양 같은 내륙의 중원지역까지는 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광동, 복건(福建) 등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로 여겼다.   이랬던 해파리가 냉채와 같은 연회용 고급요리로 발달한 것은 18세기 중반 청나라 무렵부터다. 청나라 전성기인 옹정제와 건륭제 때 당시 상류층의 고급요리를 기록한 『수원식단』에 해파리 요리가 보인다. 부자들의 미식으로 발전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이 무렵부터는 해파리가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넘어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청나라 의학서에는 해파리가 몸속 기운을 잘 통하게 하여주고 뭉친 피를 풀어주는 음식, 그리고 숙취와 해장에도 좋다고 나온다. 『귀연록』이라는 청나라 의학서에서는 심지어 묘약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동안에는 별별 것 다 먹는다는 중국에서조차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해파리였는데 왜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고급 요리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문화적, 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모든 음식 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식재료들이 많았으니 해파리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 대륙을 차지한 만주 출신의 청나라 상류층에서 자신들에게는 흔했던 곰 발바닥 같은 전통 산해진미보다 먼 곳 바다에서 나는 희귀한 식재료였기에 더 특별한 진미로 여겼던 것 같다. 더불어 상류층의 식도락이라는 단순한 호기심과 유행을 명품 요리로 발전시킨 요리사의 솜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한테는 단순한 별미 중국 음식이지만 해파리냉채는 상어지느러미, 바다제비 집 요리와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청나라 후반, 고도의 사치와 식도락이 만들어 낸 미식 요리였다. 참고로 조선 후기 문헌에는 이 무렵 중국 배들이 해파리를 잡으러 우리 바다를 수시로 침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해파리가 곧 돈이 됐기 때문이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2023.08.04 06:00

  •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메시와 ‘설산의 토끼’

    [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메시와 ‘설산의 토끼’

    사진 셔터스톡 축구의 신, 메시가 중국 전문가라고?! 수억 명의 중국인이 메시를 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중국 전문가’는 아니다.   중요한 지위로 인해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내가 중국에 인맥이 많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내가 리더로 있을 때 그 일을 해냈다고 해서 ‘내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많은 중국인이 나를 안다고 해서, ‘내가 중국 전문가’라는 착각도 안 된다.   중국어에 ‘인주차량(人走茶凉, 사람이 가면 차가 식는다)’이라는 말이 있다. 자리에서 물러나면 아무도 안 챙겨준다(혹은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업그레이드된 농담도 있다. ‘인주차불량(人走茶不凉, 사람은 떠나도 차는 식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떠나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떠나도 누군가가 ‘얼마 전까지 당신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는 말이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맡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다.   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하고 인정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환영과 인정의 대상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를 인정하는 (혹은 인정하는 듯해 보이는) 중국인들이 많다고 내가 바로 중국 전문가’라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최고의 축구선수인 메시를 잘 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메시가 중국 전문가라고 말 못한다.   물론 메시가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는, 대단한 중국 전문가도 못해낼 일을 메시라면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런데도 메시는 중국 전문가가 아니다. 중국에서 어느 한 부분을 해낼 수 있다고 해서 중국통이 아니다.   중국을 ‘내가 잘 알아야’ 중국 전문가다. 그래야 다양한 영역에서 바른 판단과 선택을 제시해줄 수 있다. ‘중국인이 잘 아는 유명인’과, ‘중국을 잘 아는 중국 전문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사람이 나보다 작아 보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설산의 토끼’라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눈 덮인 설산의 추위가 위협하는 동상(凍傷)이 아니다. 바로 ‘산 아래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산 위에서 보니 저 산 아래의 커다란 코끼리도 작아 보인다. 코끼리가 작아 보이니, 발가락 하나로도 코끼리를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의 위치(나의 지위가 만들어 준 환경 및 권력)와 ‘본 실력’을 혼동하면 안 된다.   양국 간의 모든 접점에서 일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전문지식을 설파하거나 혹은 결정을 하는 리더들은 한 번쯤 겸손하게 스스로 돌아봤으면 좋겠다. 나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설산을 지배할 수 있는 ‘설산의 맘모스’일까? 아니면, ‘코끼리가 작다’라고 여기는 ‘설산의 토끼’일까?  ━  신(新)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   우스개 하나 소개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라 불리는 사상가들이 활약했다. 사상적으로 중국문화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해주었다. 요즘에 제자백가에 두 가지 새로운 학파가 편입되었다고 한다. 바로 전문가(家)와 정치가(家)이다. 신제자백가라 불리는 이들을 시각장애인(이 사례로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해드릴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불쾌하시면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에 비유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중에 수많은 사람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맨 앞에는 한 명이 등불을 들고 그들을 인도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등불을 들고 인도하는 사람이 맹인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어느 학파일까?”   등불은 시각장애인인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나 따라오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뒤따라오는 대중들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등불이 있으니 앞을 잘 내다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등불이 비유하는 의미는 아마도, 지위, 학벌, 재력 및 권세 등이 되겠다). 본인은 정작 앞을 못 보는데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등불을 들고 수많은 사람을 인도한다.   질문에 대한 정답이 바로 ‘전문가(家)’와 ‘정치가(家)’다. 수많은 사람을 인도할 정도의 권위가 있고 또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 제자백가에 당당히 편입되었다.  ━  ‘전문가(家)’와 ‘정치가(家)’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 준다?   泥菩萨过江 自身难保(진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넌다. 진흙이 물에 풀어지니 제 몸도 간수 못 한다)   그런데 이 두 부류에도 구분이 있다. 전문가는 ‘본인이 시각장애인임을 모르고 인도’하는 이들이다.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확신을 갖고 사람들을 인도한다.   정치가는 ‘본인이 시각장애인인 줄 알면서도(이 사실을 숨긴 채) 남들을 인도’한다. 정치가(우리말로는 정치꾼이겠다)는 자신이 모르거나 틀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익을 위해 대중을 이용한다.   두 부류 모두 상황을 판단하고 직간접적으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무리다. 비유 속의 전문가와 정치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가와 정치가라기보다는) 회사든 정부든, 대기업이든 소규모 기업이든 조직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리더들을 가리킨다.   통렬한 풍자다. 우리에게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고 또 의사결정을 하는 이들이 사실은 ‘무지한 이들’이며, 그런데도 우리를 ‘리더의 위치에서 인도’한다는 것이다. 泥菩萨过江(진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넌다) 진흙은 물에 풀어진다. 진흙으로 만든 보살은 물을 건널 수 없다. 남을 구제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보장 못 한다.  ━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도 없지 않다.   사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는 않는다. 모든 실패의 원인 역시 모두 사드 책임으로 몰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뛰어난 중국 전문가가 있겠다. 한편 그야말로 무늬도 아닌데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정치가, 유명인, 그리고 대기업 같은 조직의 고위층에 많아 보인다. 잘 나갈 때는 그 자리를 통해서 유력한 중국인들을 만나며 중국통이라고 자처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저런 문제가 닥쳤을 때 전문가의 역할을 해내는 일을 본 적이 (기억으로는 별로) 없다. 대기업들은 사드와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우리 한국 기업이 차별받고 있다’라는 분석(혹은 변명)에만 매달리고 있다. 대기업과 정부가 큰 그림을 그려주고, 또 (쉽지는 않겠지만) 옳은 방향을 찾아줘야 한다. 그래야 중견· 중소기업이 그 길을 따라서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자영업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드로 인한 피해는 엄청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드가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겠지만, “모든 실패는, 100%…. 전적으로… 완전히..…무조건…. 사드 때문이다”라는 해석은 제대로 고약하다.   (물론, 사드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드 이후로 일부 산업에 있어서 “유럽이나 일본 등의 제품은 여전히 강세지만 중국 기업들이 우리 한국 기업의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현상이 모두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직 사드 때문이다. 오직 한국만을 겨냥하고 있다”라는 결론은 위험하다. 3등이 순위를 올리겠다고 바로 1등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한다. 우선 2등의 시장을 공략한다. 우리가 2등이라서 우리의 시장을 겨냥하는 것이지 사드로 인해 “무조건 우리나라만 괴롭힌다”는 분석은 부족하다. 우선 우리가 1등과 비교해서 무엇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더 고민하자는 말이다. 자기반성은안 하고 오직 사드로만 탓을 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현실적으로 당분간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이나 정부의 리더들은 ‘모든 문제와 사업 곤란의 원인을 오직’ 사드에 돌린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조직 내에서 “그렇지! 사드 때문에 어쩔 수 없지!”라며 더는 추궁을 당하지 않나 보다. 큰 조직의 리더들은 그렇게 해도(혹은 그렇게 해야) 지낼 만 한가 보다.   사드 피해가 진행형이 되어 버렸다. 사드가 끼친 본래 피해도 있지만, 또 우리 내부의 ‘왜곡’으로 인한 피해가 있다. “모든 문제는 사드로부터…”라고만 하다 보니 다른 심각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를 모르니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모두 사드 때문이라고 이해’해주니 더는 해결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가 있다. 일부 전문가나 책임자급인 리더들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책임은 사드로…’라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로 손뼉 치며 호응한다.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들은, 속으로는 사드에 고마워하는지도 모르겠다.   方法总比困难多(문제의 해결방법은 늘 어려움보다 많다). 车到山前必有路(차가 산 아래에 이르면, 길은 분명히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에는 길이 없는 듯해도, 산 앞까지 가서 보면 반드시 길이 있다. 문제를 제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 첫 단계는, 우선 문제를 숨기거나 가리지 않는 것이다.   코끼리가 늙고 병들어 죽어 넘어진다. 땅에 닿는 순간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바늘에 찔렸다. 이걸 보고 “코끼리가 죽은 이유는 딱 하나, 바늘에 찔렸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곤란하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우선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문제 앞으로 나아가자. 문제를 직시하자.   우리나라의 중국연구(또는 기획·마케팅 부서 및 중국 전문가)는 어쩌면 ‘중국(인)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인)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위기가 닥치면 지혜로운 위기대응이 안 되니 그래서 맨몸으로 맞는다. 기회는 오는데 적절한 활용을 못 하니,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보내 버린다.   어느 최고 권위의 중국 관련 연구소에 있는 후배의 하소연을 전해 들었다. “여기에 나만 빼고는, 모두 미국 박사들이에요…. 빨간불이라고 기다리자고 했더니 다들 괜찮다고 하며 건너가고 있습니다. 신호등을 보고 지키는 나에게 오히려 이상한 눈초리를 줍니다…. 내 말은 어디에도 반영이 안 돼요….” 중국 관련 학사와 석박사를 다하고 오랫동안 중국 관련 교수를 하는 교수가 ‘중국 연구소에서 나만 혼자 중국 신호등을 보고 있다, 알려줘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 미국 학위자들이 결정한다’는 푸념이다.   어디서 근무(또는 공부)를 오래 했는가, 즉 어디 출신인가 하는 것은 ‘성향과 취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는 판단과 결정에서도 일정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미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한 이들은 (심지어 중국 관련 공부를 했다 해도) 부분적으로는 미국 전문가다. 미국 전문가의 시각으로만 중국을 재단하면 오류가 생길 여지는 당연히 많겠다.   중국을 분석하는 부서(혹은 연구소)라면, 우선은 중국(인)을 연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닐 것이다. “중국(인)은 앞으로 이렇게 가야 글로벌에 맞다. 중국시장은 우리 제품을 이렇게 좋아해 주는 게 맞다. 그게 글로벌이다. (우리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직 중국인들의 중국뽕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  人走茶不凉(사람은 떠나도, 차는 식히지 말자)   많은 선배와 기업들이 중국을 떠났지만, 씨를 말리지는 말자. 일감도 남기고 후배도 양성하자   나무가 큰바람에 흔들린다. 숲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나무들과 그 숲이 멀리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은 없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흔들리는 반경을 대충이나마 판단할 수 있다. 그 나무의 뿌리가 그것을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의 예측을 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문화가 사유체계와 행동 규범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학위와 권위(?) 또는 지위라는 ‘등불’을 들고 다수를 이끄는 ‘신제자백가의 정치가와 전문가’와 같은 리더라면 스스로 본인의 ‘중국 시력(視力)’이 얼마나 되는지 가름해 봤으면 좋겠다.   젊은 중국 전문가가 지속해서 양성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중국말을 하고, 중국 책을 읽는 게 눈치가 보인다니 기가 막힌다. 친중파는 과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와 당연히 다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친중파(혹은 지중파) 라고 쓰고, ‘매국(賣國) 친중파’라고 읽는 듯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누구라도 중국을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중국과 손을 잡게 될 때, 수교 30여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또다시 ‘중국 1년 차 신입생’을 반복하면 안 된다. 최소한 중국을 공부하는 후배를 양성하고 그들이 배우고 활동할 공간도 일감도 남겨야 한다.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배들이 “저 이제 중국 관련 일은 안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 “어? 왜?” 했다. “선배님 때가 좋았는데요….” 후배들의 이 말에 “그래 그때는 좋았지!”라며 잠시 활기 넘치던 과거를 떠올린 적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후배에게 잘 보전해서 전달했어야 할 일터와 꿈을 선배라는 이들이 탈탈 털어먹기만 한 것 같다.   전망이 없어서, 풀이 죽은 채로는 배움의 효율을 높일 수 없다. 경기는 한 두 번 질 수도 있고 나쁜 상황이 계속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종목을 영원히 포기하면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있는데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는데 우리만 각을 세우고 스스로 문을 닫고 퇴출하려는 것 같다. 비통하다.   설령 칠흑의 어둠 속이라도 짜증 내지 말고 최선의 길이 아니라면 차선(아니면 차차선)의 길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과일을 따 먹기만 하고 심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과일나무까지 베지는 말자. 이전 칼럼에서 인용한 말이 있다. 薪尽火传(땔감은 떨어지더라도, 불씨는 전해져야 한다)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3.08.03 06:00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치유의 음식 쏸라탕(酸辣湯)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치유의 음식 쏸라탕(酸辣湯)

    중국인의 힐링푸드 쏸라탕. 셔터스톡 어느 나라나 먹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식이 있다. 평소에는 무심코 먹지만 감기몸살 등으로 몸이 아플 때, 숙취로 속이 괴롭고 입맛이 없을 때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음식, 힐링푸드다.   중국 음식 중에는 쏸라탕(酸辣湯)이 그런 음식 중 하나다. 보통의 경우는 딤섬 전문점에서 간단하게 먹는 음식인 샤오츠(小吃)일뿐이다. 코스 요리에서도 주로 식욕을 북돋아주는 전채요리, 또는 소화를 돕는 식후 마무리 음식으로 먹는다.   하지만 중국인들, 몸이 불편할 때도 쏸라탕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가 예전 속을 풀거나 땀을 내야 할 때 고춧가루 푼 콩나물국을 먹으며 개운함을 느꼈듯 중국에서도 몸이 오슬오슬 떨릴 때, 어젯밤 과음으로 속이 뒤집힐 것 같을 때 매콤 새콤한 쏸라탕 한 그릇이면 괴로움이 씻은 듯 사라지고 온몸이 거뜬해진다고 말한다.   쏸라탕이 뭐길래 이런 힐링효과가 있을까 싶은데 맛이나 재료 모두 특별한 것은 없다. 잘게 간 돼지고기와 두부 죽순 등을 식초와 후추 고추기름 등으로 조리한 그저 그런 음식일 뿐이다. 굳이 눈에 띄는 재료라면 죽순 정도가 되겠는데 대나무가 많은 중국에서는 이 또한 흔하디 흔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맛은 조미료로 들어가는 식초와 후추, 고추기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시큼하면서(酸) 맵고 얼얼한(辣)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름이 쏸라탕이다.   쏸라탕은 매운 맛을 좋아하는 사천과 호남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하남과 섬서, 산서성 등에서도 옛날부터 널리 퍼졌던 음식이다. 다만 이름을 후라탕(胡辣湯)이라고 했다. 쏸라탕의 원조격 음식이다.   눈에 띌 것 없는 쏸라탕과 후라탕을 왜 치유와 위안의 음식, 특별한 요리로 여기게 됐는지는 음식의 역사와 유래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쏸라탕(후라탕)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송나라 때 생겨났다는 설이다.   이 음식은 원래 송나라 황실의 강장 요리였다고 한다.   12세기 초, 북송이 여진의 금나라에 패해 황제인 휘종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을 겪었다. 이 때 후라탕을 만드는 황실 요리사도 함께 잡혀갔다. 북방으로 끌려간 요리사가 간신히 탈출해 낯선 땅을 헤매다 호(胡)씨 성을 가진 현지 주민에게 구출됐다. 감사의 표시로 황실 양생요리 비법을 전수해 주면서 호씨의 이름을 딴 후라탕(胡辣湯)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 퍼진 음식이라는 설도 있다. 15세기 명나라의 청백리라는 우겸이 하남과 섬서의 성장격인 순무로 있을 때 현지 시찰을 돌 다 과로로 쓰러졌다. 이때 머물던 호기(胡記)라는 반점에서 후추와 식초로 맵고 새콤한 음식을 끓여 올리니 이 음식을 먹고 몸살이 씻은 듯 나았다. 그래서 여관 겸 음식점 주인의 이름을 따서 후라탕이 됐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터무니없는 속설이고 문헌 근거도 없지만 그래도 참고할 부분이 있다. 쏸라탕(후라탕)의 기원을 송나라 내지 당송시대, 혹은 명나라로 본다는 것인데 두 시기 모두 후추(胡椒)와 관련 있다.   중국에 후추가 처음 알려진 것은 물론 한나라 이전의 고대지만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5세기 남북조 시대다. 이후 당나라 때 실크로드를 타고 수입되면서 상류층에 퍼졌다.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와 동남아 일대지만 당시 문헌에는 서역의 대진(大秦)과 파사국(波斯國)에서 나온다고 했다. 대진은 로마제국, 파사국은 페르시아다. 아직 광동과 남중국해를 통해 인도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가 열리기 전이고 히말라야 산맥에 막혀 인도와의 직접 교역도 불가능했으니 멀리 로마와 페르시아를 거쳐 비단길을 타고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니 후추가 얼마나 귀하고 비쌌을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이 무렵 중국에서 후추는 조미료가 아닌 약으로 쓰였다. 후추를 먹으면 수명이 늘고 도교의 도사들은 후추 태운 연기로 호흡하면 늙지 않고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후추로 끓인 쏸라탕(후라탕)이었으니 송나라 황실의 강장요리가 됐고 후추가 흔해진 후에도 후추탕에 대한 환상이 남았다.   이렇게 귀했던 후추가 명나라 때 정화함대의 동남아 항로개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얼마나 넘쳐났는지 조정에서는 관리들의 녹봉을 후추로 지급했을 정도다. 이때부터 후추는 신비의 선약, 최고급 향신료에서 평민의 일상 조미료가 됐다. 쏸라탕이 대중화된 계기이고 명나라 때 기원했다는 속설이 생겨난 배경이다.   덧붙여 쏸라탕의 또 다른 재료인 식초 또한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지금은 평범한 조미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양조업이 발달해 대중화되기 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병통치약 비슷하게 쓰였다. 중국 의학서에서는 하나같이 식초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위와 간을 보양하면서 술을 깨게 할 뿐만 아니라 소화를 돕는 기능도 있다고 했다.   이런 식초와 후추로 조리한 쏸라탕에다 어머니 정성과 손맛까지 더해졌으니 힘들 때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음식이 됐던 것이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더위에 지쳤을 때도 쏸라탕을 먹으며 기운을 차린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3.08.02 06:00

  • [중국읽기] 100년 자동차 왕국 깬 중국의 ‘863 계획’

    [중국읽기] 100년 자동차 왕국 깬 중국의 ‘863 계획’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조립 승용차 ‘T모델’을 출시한 건 1908년이다. 그 후 미국은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 자리를 지켰다. 신화가 깨진 건 2009년. 그해 미국은 ‘100년 자동차 왕국’ 자리를 중국에 내줘야 했다. 지난해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약 2700만대. 1000만대를 만든 2위 미국을 큰 차이로 눌렀다.   그렇다고 중국을 자동차 ‘강국(强國)’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기술은 여전히 서구에 뒤진다. 그런데 또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은 자동차 대국이자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기차 생산 대수, 기술 모두 미국을 압도한다. 전기차 호조 덕택에 중국은 올 1분기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상하이모터쇼에 나온 BYD의 소형 전기자 ‘시걸’. 중국은 올 1분기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이 됐다. [사진 신화사] 돌아보면 20년 ‘레이스’였다. 중국이 국가 첨단기술 육성 프로그램인 ‘863 계획’에 전기자동차를 포함한 건 2001년이다. ‘가솔린 엔진은 미국에 뒤졌지만, 전기 엔진은 우리가 앞서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판을 바꿔 승부한다’라는 전략이다.   ‘863 계획’은 1986년 3월에 발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가가 전략 기술을 선정하고, 관련 기업이나 연구소(대학)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중국 전기차의 대표주자 BYD 역시 2012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863 계획’은 2016년 기초과학 육성 프로그램인 ‘973 계획’ 등과 함께  ‘국가중점연구개발계획’으로 통합된다. 그러나 골격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가 나서 핵심 전략기술을 선정하고, 자원을 몰아주고, 기업과 연구소를 연결한다. 필요하면 외국 기업을 몰아내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도 한다. 2016년 한국 배터리 회사가 중국에서 퇴출됐던 이유다.   전기차뿐만 아니다. 우주항공·고속철도·5G통신·수퍼컴퓨터 등이 ‘863 플랫폼’을 타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했다. 육성 대상 기술은 AI(인공지능)·신에너지·신재료·양자컴퓨터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전략 기술을 키운다.   헨리 포드의 손자인 빌 포드 현 포드자동차 회장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늦었다. 그들(중국 전기차)은 곧 미국 땅에 올 것이다. 우리는 대응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 100년 아성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린다.   ‘863 계획’은 살아있다. 지금은 반도체 기술 및 생태계 육성에 필사적이다. 그들은 여전히 반도체 분야 판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7.31 00:36

  •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가능할 것인가? (下)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가능할 것인가? (下)

    사진 셔터스톡 미국과 우방국들의 반도체 분야 대중(對中) 봉쇄 극복은 수많은 난관을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이다. 봉쇄가 장기화할수록 반도체 가치사슬의 대부분을 스스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중한 현실에 직면해서 중국이 추구할 수 있는 대응 방안은 무엇일까?  ━  향후 10년간 중국의 대응방향 전망과 한계   중국에 이상적인 전략적 환경은 반도체 대외의존도는 낮추고, 추가적인 서방의 압력을 억제(deter)하고 내수 충족에 중국기업의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다. 즉,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에 유리한 비대칭적 디커플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로는 새로운 제재를 피하거나 우회하고, 우방국과 미국 간의 관계 교란, 산업 스파이 활동 강화 및 인재 영입, 중국이 레버리지를 갖는 수단을 통한 보복 등을 들 수 있겠다.   주요국과의 관계를 관리해 더 이상의 제재가 취해지지 않도록 하거나 반도체 수급이 어려워 자체 클라우드 인프라를 강화할 수 없는 중국의 빅테크들이 봉쇄에 참여하지 않는 국가의 클라우드 인프라를 이용해 제재를 우회하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EU와 투자협정(CAI)을 다시 추진하거나 중국 시장에 이해관계가 큰 국가와 미국과의 관계를 교란하려는 시도도 예상된다.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로 우리 기업이 대미(對美)관계에서 곤란한 입장에 빠지도록 하는 것도 이런 전술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점차 어려워지겠지만 반도체 기술 선진국 기업들에 대한 산업 스파이 활동이나 기술인력 유입 노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될 것이다. 희토류와 같이 중국이 레버리지를 가진 희귀광물을 무기로 활용하는 것도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옵션이 될 수 있다. 단, 희귀광물은 호주와 같은 자원 부국이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 효과를 노리다 장기적으로 레버리지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고립되면 자강도 어렵다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미세 페터닝 기술 등 핵심 기술 확보를 위해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난니완(南泥灣) 프로젝트는 그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서구에서 수많은 파트너 기업들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기술적 생태계를 중국이 외부와 단절된 환경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향후 10년간 미국 중심의 반도체 생태계가 극초미세 수준으로 계속 발전할 때 SMIC 등 중국 기업들은 여전히 10나노의 벽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미세 공정뿐만 아니라 첨단 반도체 설계, 기초 재료나 소자 등 기술적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분야는 많다. 앞으로 10년간 중국이 독자적으로 이런 난관들을 돌파하지 못하면 중국의 전략적 입지는 크게 손상을 받을 것이다.   관련기사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가능할 것인가? (上)  ━  정실 자본주의의 한계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는 기술 유입의 봉쇄뿐만 아니라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는 정실 자본주의(情實資本主義), 즉 중국 반도체 산업이 작동하는 시스템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HSMC 사건은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중국식 정실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다. 2017년 설립 당시부터 14나노급 양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며 지방정부 및 투자회사로부터 1280억 위안을 투자받아 굴지의 파운드리 기업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던 HSMC는 결국 보조금을 노린 사기극의 주인공으로 드러났다. 별다른 특허도 없는 기업이 실사도 받지 않고 거액을 유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국 시스템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설립에 관여한 주요 인사들의 행방조차 묘연한 HSMC 사건은 정실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을 웅변한다. 사실 수많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시장 원리를 통해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 재투자하는 선순환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왔다. 이런 식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결국 전체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지만 반도체 굴기의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지금도 거대한 지금을 반도체 산업 지원에 투입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정책 기조를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  미래 반도체 생태계의 분리   장기적으로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는 초미세 공정이나 소자 성능 한계 등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기술적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주도하에 새로운 아키텍처, 소재, 장비, 컴퓨팅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우방국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기술 독과점 클럽이 기술 로드맵과 표준을 주도하게 될 것인데, 지정학적 경쟁의 시대에 중국이 여기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비록 현재의 반도체 기술 패러다임에서 핵심기술의 자립에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독자적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미 중국의 기초과학 연구 수준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는데 특히 화학과 재료과학, 공학 전반에서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양자 ICT와 같은 차세대 반도체 기술 관련 투자도 경제규획의 핵심 육성 영역에 포함되어 있어 중국의 독자적 기술 생태계 구축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반도체 생태계가 병존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단순히 R&D 규모 경쟁이나 엔지니어 수의 문제가 아니라 투자, 혁신, 인터넷 거버넌스 규범을 포괄하는 국가혁신체제간의 우월성 경쟁에서 그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시장 기구에 주로 의존하는 미국‧서구의 혁신 모델과 달리, 중국 모델은 국가가 기술의 표준이나 범위와 같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자원을 선별적으로 투입하는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기초연구의 성과를 전략적 선택과 집중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이어지게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외부와의 교류‧ 상호의존이 제한된 환경에서 국가가 일종의 벤처캐피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기술 리더십을 달성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찾기 어렵다. 만약 성공한다면 모방이 아닌 진정한 혁신과 정치‧경제‧사회개방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동안의 상식을 뒤집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독자적 생태계를 만들었다 해도 경쟁력 열위의 갈라파고스화된 중국 반도체 생태계는 4차 산업혁명의 지체, 첨단 군사기술 열위 및 경제 성장세의 둔화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미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중국이 열세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우리의 대차대조표와 미래 전략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중국 시장에서 우리 매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계산법이 아닐 수 없다. 제재 동참국의 장비 반입 제한으로 중국 내(內) 우리 기업의 생산, 매출이 영향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조치로 인해 잠재적 중국 경쟁자들이 입는 타격이다.   낸드 시장에서 양쯔메모리(YMTC), DRAM 시장에서 창신메모리(CXMT)와 같은 중국 기업들이 우리를 추격하기가 사실상 난망해진 것이다. 반면에, 만약 제재가 없었다면 결국에는 중국 시장, 더 나아가 제3국 시장에서 우리의 입지가 약화했을 것이다. 이는 과거에 스마트폰 세계시장 판매 1위로 올라섰던 화웨이를 미국이 제재함으로써 우리 스마트폰이 여전히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어쩌면 중국으로 향할 수도 있었던 해외설비 투자가 미국으로 전환됨으로써 중국으로의 기술‧인재 유출보다는 미국 주도 반도체 생태계의 기술과 인재를 활용할 기회가 커지는 것도 보이지 않는 이익이다.   단기적 이해득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우방국들로 구성된 기술 독과점 클럽이 주도할 미래 반도체 산업 지평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클럽 참여국과의 전략적 제휴, 기술협력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대내적으로도 차세대 반도체 관련 기초연구 및 인력양성에 매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당당한 클럽 회원으로서 전략적 협력을 요구하려면 그에 걸맞은 레버리지를 갖추고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계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더차이나칼럼

    2023.07.27 06:00

  • 위안스카이는 '깃털'이었다…싱 대사 도발을 읽는 '역사속 단서'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위안스카이는 '깃털'이었다…싱 대사 도발을 읽는 '역사속 단서' [채인택의 세계 속 중국]

    이홍장(왼쪽)과 위안스카이(오른쪽) 주한 중국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의 발언 때문에 구한말 청의 군인으로 한성(서울)에 주재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1859~1916)가 새삼 불려 나오고 있다. 싱 대사는 지난 6월 8일 명동의 중국대사관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미리 적어온 메모를 꺼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패배에 배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점” 등의 발언을 하면서다.   (※중국 인명은 1912년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이전은 한국식 한자읽기로, 이후는 중국 한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게 원칙인데,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그 전후에 걸쳐 활동했으므로 처음에는 둘을 모두 병기하고 그 뒤는 위안스카이로만 쓴다)    ━  서구에 침탈되면서도 조선 속국화와 중화질서 유지 집념     이에 따라 1882~1894년 조선에서 머물며 위세를 떨었던 위안스카이에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서 발호하던 당시의 중국 내부 사정과 국제정세, 그리고 조선과 청의 관계를 살펴보면 위안스카이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에는 서구세력에 침탈당해 빈사의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조선의 속국화와 내정간섭을 노리면서 경제적 이익과 중화질서 유지를 노렸던 중국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청의 실권자였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그 몸통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런 중국의 실체나 국제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정파나 족벌의 이익을 앞세워 그들의 힘을 빌리려는 일부 국내 세력의 근시안적 사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홍장은 중국에선 난세의 장수로 통한다. 2000만~7000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19세기 역사의 비극인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 당시 회군(淮軍)이란 민병대를 조직해 활약한 인물이다. 의용군인 상군(湘軍)을 편성해 일등공신이 된 증국번(曾國藩·1811~1872)에 이어 베이징 주변 수도권과 통상을 전담하는 북양통상대신(북양대신으로 통칭)을 맡아 중앙정부의 일인자가 됐다.      ━  이홍장, 조미 수교 개입해 ‘조선은 청의 속국’ 명문화 압박   그런 이홍장은 1882년 5월 22일 조선의 전권대관 신헌(申櫶‧1810~1888)과 부관 김홍집(金弘集‧1842~1996)이 미국 전권위원인 로버트 슈펠트(1822~1895) 군함 타콘데로가호 함장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당시 조선에 대한 외교적 간섭을 시도했다. 신헌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도 맡았다.     그 배경은 이렇다. 1879년 미국을 출발해 세계일주에 나선 타콘데로가호는 일본을 거쳐 1880년 부산에 도착해 현지 일본 영사에게 조‧미 통상조약을 맺기 위한 중개를 요청했지만 불발됐다. 그러자 청으로 가서 실력자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홍장은 1882년 3월 자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1845~1900)과 북양수사(北洋水師‧아중에 북양함대로 바뀐 청의 해군)를 건설하고 있던 회군 부하장수 정여창(鄭汝昌‧1836~1895)을 사신 자격으로 조선의 제물포에 파견했다. 슈펠트는 이들의 중개로 그해 5월 22일 조선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청이 슈펠트에 딸려 파견한 사신 마건충과 정여창은 조‧미 수호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이 청의 속국이다’라는 문구를 조약 1조에 명문화하려고 시도했다. 이홍장이 이들에게 맡긴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미국 측의 거부로 수호조약에 이를 명문화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은 조선을 압박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조정했다. 청의 조선에 대한 집요한 종주권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19세기 청나라는 제국주의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였다.      ━  프랑스 유학 국제법 전문가 마건충도 ‘중화질서’   주목할 이물은 마건충이다. 마건충은 가톨릭교도로 1878년 프랑스에 파견돼 파리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2년 뒤 중국인으론 처음으로 프랑스 학사 학위를 받은 유학파 지식인이다. 그럼에도 중화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터지자 이홍장 휘하로 들어가 회군의 보급을 맡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1895년 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의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대만‧펑후(澎湖)제도‧랴오둥(遼東)‧반도를 일본에 떼어주는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을 맺을 당시 수행했다. 랴오둥은 일본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하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당시 할양되지는 않았다.      ━  백년국치 속 ‘약한 고리’ 조선에 ‘정신승리’ 노려     주목할 점은 당시 중국의 상황이다. 청은 1839~1842년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과 1856~1860년 애로호 사건에 이은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등과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계(외국인 거주지역)를 설치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불평등 조약을 맺는 치욕을 당했다. 청이 그나마 평등하게 맺은 통상조약은 1871년 일본과 맺은 것이 유일했다.    이렇게 중화질서와 자존심이 무너지고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청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선 이를 ‘100년 국치의 시대’가 시작된 때로 본다. 이렇게 서양 세력에 치욕을 당한 청은 조선과 통킹(북베트남)베트남 등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던 이웃 나라를 압박해 중화질서의 상징적인 복구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청은 조선과 통킹을 중국의 ‘정신승리’를 연출할 수 있는 약한 고리로 여겼던 셈이다.      ━  임오군란으로 중전 민씨 일가가 파병 요청   이처럼 서양 세력의 침탈 속에서도 중화질서의 재확립의 기회를 노렸던 청의 실력자 이홍장은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7월 23일~8월 30일)이 발생하고 중전 민씨 일족이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내정간섭의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 임오군란은 훈련도감의 구식군대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중전 민씨 일족을 내쫓고 1864~1874년 섭정을 하다 탄핵으로 물러났던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을 다시 옹립한 군사 정변이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밀려 해산하게 된 데다 13개월간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그나마 받은 쌀에 모래가 섞여있자 분노가 폭발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별기군은 1881년 주로 양반인 80명의 병력으로 신설돼 일본군 장교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주변에서 무단으로 측량을 하던 자국 선박이 포격을 받자 영종도에 상륙해 교전한 운요(雲揚)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선과 수교해 한양에 공사관을,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했으며, 별기군의 훈련도 맡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중전 민씨는 장호원과 여주를 거쳐 충주로 피신했으며, 다급해진 민씨 일족은 7월 24일 당시 영선사(領選使)로서 유학생을 데리고 청의 톈진(天津)에 가있던 김윤식(1835~1922)과 어윤중(魚允中‧1848~1898)에게 청에 파병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8월 2일 이를 접수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으며,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     당시 상을 당한 이홍장을 대신해 북양대신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그의 부하 장수성(張樹聲‧1824~1884)은 이홍장과 의논해 즉시 파병을 결정했다. 책임자인 회군 출신 청나라 제독 오장경(吳長慶, 1834~1884)은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에서 군함 세 척과 상선 두 척에 3000명의 병력과 물자를 싣고 경기도 남양만의 마산포(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마산포)에 상륙했다.      ━  책봉조공 관계는 내정 불간섭이 원칙…조선 파병은 전례 없어   임오군란 직후 청 군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은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외교 참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오래도록 책봉과 조공 체계였다. 형식적으로 책봉을 받고 조공외교만 하면 중국은 조선의 독자성과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조선은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丁丑下城)’ 이후 청에 250여 년 동안 500회가 넘게 사신인 연행사를 베이징에 파견해 조공무역을 했다. 시작을 1644년 4월 청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본토로 들어간 입관(入關) 이후로 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청이 1895년 청일전쟁 패전 직후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제1조에 ‘조선의 독립국임을 인정한다’고 명시해 책봉‧조공 체계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중국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1894년 1차 갑오개혁까지로 치기도 한다. 동학란이 터진 1894년 서태후 육순 축하 진하사가 사실상 연행사였다. 당시 연행사는 산해관에서 베이징까지 철도로 갔으며, 청일전쟁으로 발이 묶었다가 나중에 선박으로 귀국했다.     이처럼 임진왜란(1592~1598) 기간 명나라의 파병과 정묘호란(1627) 당시 후금의 침략, 병자호란(1636~1637) 때 청(후금이 1636년 이름을 고침) 태종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며,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중국은 조선에서 누가 실권자가 되든지 신경쓰지 않았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의 파병은 이러한 전통적 관례를 무시하고 조선에 군대를 보내 내정을 무력으로 간섭한 첫 사례가 됐다. 책봉‧조공을 바탕으로 하는 종래의 동아시아 외교관계는 중국이 내부통치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으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 파병은 이러한 양국 관계가 힘을 바탕으로 내정간섭을 시도하는 관계로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23세 ‘낙방거사’ 위안스카이, 대원군 강제연행해 납치     1882년 8월 12일 한성에 입성한 청군은 당시 낙동(駱洞)으로 불리던 명동을 중심으로 용산 등 한성 여러 곳에 나누어 주둔했다. 오장경은 당시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을 간 좌포대장 출신 이경하(1811~1891)의 낙동 집을 차지하고 본부로 삼았다. 바로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한성 한복판에 자리 잡은 청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요인 납치였다. 오장경은 함께 온 마건충 등과 의논해 회담을 하자며 흥선대원군을 유인한 뒤 억류해 남양만으로 데리고 가서 배에 태워 중국 톈진(天津)으로 납치했다. 오장경의 부하인 하급 무관 위안스카이가 흥선대원군 억류와 납치에 앞장섰다.     위안스카이는 중원 한복판인 허난(河南)성 샹청(襄城)현 출신으로, 과거(科擧) 1차시험에 해당하는 향시(鄕試)에 두 차례나 떨어진 ‘낙방거사’였다. 과거로는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22살 때인 1881년 양아버지 원보경(袁保慶)의 인맥을 이용해 오장경의 휘하에 들어가 회군의 무관이 됐다. 이듬해인 1882년 임오군란으로 오장경의 군대가 출동하자 이를 따라 조선에 온 것이다.     조선을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라는 관청에 억류됐다. 청은 한국의 내정에 대놓고 개입할 목적으로 요인 납치라는 범죄를 예사로 저질렀다. 이홍장은 파병한 군대를 움직여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제거하는 것으로 내정 간섭을 시작한 셈이다. 임오군란으로 몰락 직전에 이르렀던 중전 민씨와 그 일족, 그리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제거되면서 회생해 친청 정권을 운영했다.      ━  상민수륙무역장정에 ‘조선은 속국’ 명시   이홍장은 여기에 더해 1882년 10월 4일 자국의 허베이성 톈진(天津)에서 조선과 교역협정인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란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 강화를 꾀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기했으며, 청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속국 지배를 시도했다. 조약의 전문에 조선은 오래 전부터 번봉국이었으며 수륙무역장정은 청이 이러한 속방에 은혜를 베풀어 특별히 우대하는 의미가 있다고 명시했다. 심지어 제1조에 청의 북양대신을 조선의 국왕과 동격으로 규정했다.     청에서는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리훙장)과 그의 심복인 주복(周馥‧1837~1921)과 마건충(馬建忠)이, 조선에선 병조판서 조영하와 김홍집‧어윤중이 서명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은 조선이 중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형식의 조약이지만 조선에서의 청 조계지 설정과 수도 한성의 상업 개방, 청상을 도와줄 상무위원의 파견과 이들에 대한 치외법권 부여 등을 담은 불평등조약이다. 청이 주둔군을 등에 업고 조선에 일방적으로 강요한 불평등 조약으로 볼 수 있다. 서구 세력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힘에 의한 현실주의 국제관계를 절감한 청이 조선에 거꾸로 이를 강요한 셈이다.     조약에는 조선인이 베이징에서 창고업‧운송업‧도매상‧점포운영을 할 수 있게 하면서 청 상인이 한성과 양화진에서 같은 업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은 통상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속방우대’는 청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해 조선의 내정과 통상을 지배하는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은 1884년 2월 조약을 개정해 청 상인의 조선 내부 통상권을 확대했다. 중국 상인이 조선 곳곳을 다니면서 장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한성에 상주공관 설치하고 인천 등엔 치외법권 조계     이에 따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진수당(陳樹棠‧1828~1888)이 1883년 9월 16일 총판조선상무위원(總辦朝鮮商務委員)이란 관직을 받아 한성에 부임했다. 진수당은 상하이에서 20년 이상 해운회사를 운영하다가 청의 초대 주미공사인 진란빈(陳蘭彬‧1816~1895) 휘하에서 초대 주샌프란시스코 영사를 지냈다. 1882년 봄 귀국해서 이홍장의 막료로 일했다가 조선으로 발령받았다.   진수당은 1883년 9월 16일부터 1885년 9월 23일까지 2년간 재임하며 청 군대가 주둔한 한성 낙동의 이경하 대감 저택에 상무위원공서 사무실을 설치했다.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가 청 군대의 주둔지에서 외교공관으로 바뀐 계기다. 진수당은 군대를 배경으로 조선을 압박해 1883년 9월 한성에 상무위원공서(총영사관에 해당)를, 11월엔 인천에 상무위원부서(영사관)를 각각 설치했다. 청 상인을 위해 인천 등에 치외법권지역인 조계도 설치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조선의 주청 공관은 베이징이 아닌 톈진에 설치됐다.     하지만 진수당은 1885년 4월 15일 시작된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귀국했다. 거문도 사건은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면서야 끝났다.      ━  위안스카이, 갑신정변 진압하며 이홍장 신임 얻어   진수당이 떠나면서 후임은 오장경의 부하였던 젊은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다. 위안스카이가 젊은 나이로 출세하게 된 계기는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이었다. 이날 저녁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씨 일족은 한성에 주둔해 있던 청 군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가 12월 6일 병력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에 쳐들어가 개화파를 진압했다. 조선의 정변을 청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개화파의 득세는 삼일천하로 끝났다.     당시 청의 실력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인 통킹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벌인 청불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이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청은 결국 패배해 1885년 5월 프랑스와 톈진(天津)조약을 맺고 자국군을 통킹에서 철수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친청 사대주의 성향의 민씨 정권에 대항해 발생한 갑신정변이란 정변을 위안스카이가 사흘 만에 진압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재확인했으니 그를 총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7월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황급하게 탈출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직함으로 조선의 내정을 대놓고 간섭했다. 조선의 군주인 고종에게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것은 물론 폐위를 겁박하기까지 했다니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  청일전쟁으로 귀국한 위안스카이, 배신의 아이콘으로     위안스카이는 귀국 뒤 이홍장이 청일전쟁(1894~95) 패배의 책임을 지고 힘을 잃자 그 공백을 파고들어 군권을 장악해갔다. 군 개혁을 맡아 성공하면서 군의 중심 인사로 부상했다. 1898년 무술변법을 무력화한 서태후(1835~1908) 등 보수파의 군사쿠데타인 무술정변을 지원해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은 1898년 6월 강유위(康有爲‧캉유웨이‧1858~1927)‧양계초(梁啓超‧량치차오‧1878~1929)‧담사동(譚嗣同‧탄스통‧1865~1898) 등이 광서제(光緖帝‧1871~1908,재위 1875~1908)를 움직여 시도한 정치‧사회 개혁이다.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으로 청의 국력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103일 만인 9월 21일 서태후 등 보수파의 무술정변으로 좌절됐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피신했지만 담사동은 잡혀서 처형됐다. 100일의 개혁 천하를 무너뜨린 건 위안스카이의 무력이었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 이홍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맡았던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1901년 11월~1907년 9월)을 차지해 최고 실권자가 됐으며, 청의 2대(마지막) 내각총리대신(1911년 11월~1912년 2월)을 지냈다. 그러다 난징(南京)에서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 초대 임시 대총통을 맡은 된 손문(孫文‧쑨원‧1866~1925)과 손잡고 청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렸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아 중화민국 임시정부 2대 임시대총통(1912년 3~10월)이 됐으며, 그 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1913년 10월~1915년 12월)을 지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중화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1915년 12월~1916년 3월)에 올랐다. 하지만 국민의 반대 속에 즉위식도 열지 못한 채 퇴위하고 다시 중화민국 대총통(1916년 3~6월)을 맡았다가 요독증으로 숨졌다. 돤치루이(段祺瑞‧1865~1936)‧펑궈장(馮國璋‧1859~1919)‧장쭤린(張作霖‧1875~1929) 등 그의 부하들은 중국의 고질적인 군벌이 돼 중국을 분열시켰다. 쑨원이 제1차 국공합작을 한 것도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다. 결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1887~1975)가 1923~26년 북벌을 마치고서야 중국은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을 중화질서 속의 속국으로 만들려던 이홍장의 의도에 맞춰 젊은 나이에 한성에서 위세를 떨친 위안스카이는 결국 청을 무너뜨리고, 신생 중화민국을 위기에 빠뜨릴 뻔한 중국 근대사의 재앙으로 기억된다. 이홍장과 위안스카이의 조선 속국화‧침탈 시도와 모욕 사례는 한반도에 큰 교훈을 남겼다. 국력이 모자라거나, 독자적인 외교전략과 지혜가 부족하거나, 정치가 분열되고 정쟁의 진창에 빠지면 사대와 속국화를 요구하는 중화주의가 언제든 한반도를 노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채인택 국제 저널리스트 

    2023.07.26 06:00

  • 과냉(過冷) 걱정하는 하반기 중국경제 [조평규의 중국 컨설팅]

    과냉(過冷) 걱정하는 하반기 중국경제 [조평규의 중국 컨설팅]

    리다오쿠이(李稻葵) 칭화대학 중국 경제사상 실천연구원 원장. 사진 eeo.com.cn 캡처 올해 들어 중국경제는 리오프닝(경제 재개)의 영향으로 투자, 수출, 소비가 늘어나 빠르게 회복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경기 부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성장률 전망치와 기준 금리를 내리는 등 대규모 부양책을 고민하고 있다. 중국 경제는 자산가치와 부동산 경기 하락, 수출 격감 등으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양상이다. 중국 경기회복의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다.    ━  중국경제 회복 왜 더디나?   코로나 19로 중국 도시는 봉쇄되거나 엄격하게 차단돼 도시에서 생활하던 외지인들이 귀향하거나 통제가 덜한 지방으로 이주했다. 대도시의 일자리는 사라졌고, 새로운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대도시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중국 도시의 인구는 감소하여 활력을 잃고 있다. 상하이나 베이징 등 대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코로나 이전 중국 특유의 북적거림을 볼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미·중 경제 전쟁으로 촉발된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통제와 디커플링 영향으로, 중국 내부의 산업 구조조정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에 신규 투자 의욕은 많이 상실된 상태며, 중국 개인과 기업은 해외에서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미국, 유럽은 물론 동남아 권역으로 회사나 생산기지를 옮기려는 현상이 도처에서 뚜렷하다.   중국 부동산 경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정부나 관련 기관의 감질나는 정책과 대책은 전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최근 몇 년 새 준공된 아파트의 공실률이 50%에 육박하는 것도 경기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부동산 불경기는 지방 정부의 재정압박으로 직접 연결된다.   청년층 실업도 심각한 수준이다. 중국의 삼포 세대로 불리는 ‘탕핑족(躺平族)’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중국이 공동부유를 내세우면서 게임, 핀테크, 빅데이터, IT 플랫폼, 교육산업 등을 규제하면서 고급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대졸자의 취업은 물론 관련 사업의 창업도 줄어들게 하여 청년실업을 가중하고 있다.    외국인들 사이에선 중국행 여행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7월 1일 발효된 반(反)간첩법의 영향 때문이다. 지문과 안면 인식 등록 등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중국 비자 발급 절차도, 외국인의 대(對)중국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까다롭고 고압적인 입출국 절차는 중국에 대한 나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지난 7월 12일 리창(李强) 총리는 알리 클라우드(阿里雲), 메이퇀(美團), 샤오훙수(小紅書)등 플랫폼 기업을 불러 좌담회를 열고, 수요 확대를 통한 새로운 성장엔진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의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를 통한 경기회복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경제 성장률에 정권의 사활을 거는 나라다. 하반기에 정부 주도의 대규모 부양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  겉도는 미·중 대화   지난달 18~19일 토니 블링컨(Tony Blinken)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 지도부와 연쇄 회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긴장 관계에 대한 본질적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20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7개국(G7) 정상회담 공동 성명에선 ‘디리스킹(De-risking)’이 미국과 서방의 대중국 전략 경쟁의 핵심 원칙으로 선언됐다. 첨단산업의 탈(脫)중국을 의미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닌 규제를 약간 풀어주는 ‘디리스킹(De-risking)’으로 다변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미국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인식하고,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라고 비난했다.   미국과 비교하면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EU 회원국들은, 중국의 집요한 선물 공세와 자국의 녹록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물밑에서 실리를 챙기기 바쁘다. 중국을 ‘전략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필수 파트너’로 보아야 한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의 새로운 변화   세계적 국제도시로 외국인이 넘쳐나던 상하이 거리에는 외국인의 모습이 많이 줄었다. 최고급 수입 명품을 파는 명품관이나 고급 음식점은 예약해야 하지만, 일반인이 이용하는 상점은 한산하다. 일반상품을 팔던 대규모 쇼핑센터는 빠른 속도로 식당으로 변신하고 있다.   창업 민영기업이나 스타트업에 적합한 업종을,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국영기업에 맡기는 현실은 시대 역행적이다. 홍콩사태나 3연임 같은 전체주의적인 국정 운영에 실망한 부자들의 해외 이민이 증가하면서 국부 유출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는 것은 중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  칭화대 교수 리다오쿠이(李稻葵)의 제안   중국 경제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칭화(淸華)대학 중국 경제사상 실천연구원(中國經濟思想與實踐硏究)의 원장 리다오쿠이(李稻葵)는“중국 정부의 거시경제에 대한 과열 방지정책에서, 과냉(過冷) 방지 방향으로 선회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경제가 여전히 향후 10년간 연 6~7%의 성장을 달성할 잠재력이 있지만, 현재와 같은 대내외적 부정적 여건이 지속되면 향후 4~5년간 연 3~4% 성장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리 교수는 중국 경제의 잠재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축으로 투자 잠재력이 충분하고, 연구·개발 능력은 10여 년 전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인적자원의 총량도 미국보다 많아 경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리 교수는 “중국경제의 과냉 방지를 위해 소비 촉진을 위한 보조금 도입,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지방채 문제 공동 해결, 신흥산업에 대한 개방, 부동산세 부과 중단, 부동산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문했다.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어 실용주의로 국부를 일으킨 중국이, 이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나 기업에 좋은 일이 아니다. 중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때이다.   조평규 동원개발 고문 

    2023.07.25 06:00

  • [중국읽기] 위험 구간

    [중국읽기] 위험 구간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권위주의 나라 중국은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볼 기회를 잡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마이클 베클리·할 브랜즈 지음)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에 몰린 중국이 현상 타파를 위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상반기 중국 경제 실적이 기대치에 못 미친 것으로 드러나면서 책 제목이 더 눈길을 끈다.   중국의 청년실업률이 높아지고 있다. 상하이 한 전철역의 광고판과 노숙자. [중앙포토] ‘피크(peak) 증세’는 뚜렷하다. 중국 경제의 성장 동력은 민영기업이었다. 민영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 GDP의 약 30%를 구성하는 부동산과 경제 혁신을 이끌어온 IT 분야다. 중국은 두 업종을 타격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철학 기반인 공동부유를 해친 ‘혐의’다. 내수 회복이 늦고, 청년 실업이 급증하는 이유다.   또 다른 성장 엔진은 수출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서방 글로벌 공급망에 편승해 경제 규모를 키워왔다. 그러나 미·중 경제전쟁으로 공급망은 단절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은 자력갱생을 강조한다. 심지어 반(反)간첩법으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한다. 수출이 온전할 리 없다.   그러기에 중국 경제의 난맥상은 경기주기가 아닌 체제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 봐, 피크가 맞잖아…” 책 저자들은 인구감소, 자원결핍 등의 요인을 더해 “중국의 30년 호시절은 끝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중국 경제는 어쨌든 5%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무분별한 성장보다 ‘고품질 발전’을 중시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말도 새겨들어야 한다. 정말 ‘피크’인지는 더 따져볼 일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저자의 대중국 정책 솔루션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안전한 동맹이라도 규합하라” “핵심기술의 중국 독점을 깨라” “중국의 약점을 선별적으로 공격하라” 등등. 모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중국은 결코 물러설 뜻이 없다. 미국의 약한 부분을 찾아 거침없이 받아진다. 전문가들은 시진핑 집권이 최소 5년, 낮춰 잡아도 10년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본다. 미·중 경쟁과 충돌 양상이 앞으로 10년 지속할 거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 시기를 ‘위험 구간(Danger zone)’이라고 했다. 비행기가 위험구간을 지날 때 승객은 안전벨트를 바짝 조여 매야 한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07.24 00:44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맛있어서 슬픈 중국 멜론 하미과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맛있어서 슬픈 중국 멜론 하미과

    중국의 대표 과일 중 하나인 하미과(哈密瓜). 사진 셔터스톡 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가장 맛있는 중국 과일 중 하나는 하미과(哈密瓜)가 아닐까 싶다. 다른 나라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은 과일로 중국 신강성과 중앙아시아에서 주로 재배하는데 맛이 다소 독특하다.   그런 만큼 중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그 맛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은 한국에서도 인터넷 주문이 가능하다. 아마 종자를 들여와 재배하는 듯싶다.   어쨌든 대부분 한국인한테는 낯선 이름인데 중국 서부에 위치한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도시인 하미(哈密)시에서 재배하는 품종이 특히 맛있어서 하미과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한테는 익숙하지 않기에 애써 이 과일에 대해 설명하자면 크기는 수박만큼 크지만 수박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참외라고 하기에는 크기도 엄청 크고 당도와 식감도 다르다. 일단 달기가 참외와는 맛과 식감이 다른 데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멜론과도 또 다른 맛이다. 일단 식감이 부드러운 멜론과는 달라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참외와 수박을 합친 것 같다. 그래서 중국 현지에서 하미과를 처음 맛보고는 그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미과의 식물학적 정체부터 알아보면 실은 우리도 많이 먹는 머스크 멜론의 한 종류다. 그중에서 당도가 특히 높은 변종인 캔털루프 멜론 계열로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산더 듀마가 사랑에 빠졌다는 멜론과 같은 계열이다. 하미과는 그중에서도 특히 당도가 높은 품종인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낯선 하미과라는 과일, 알고 보면 꽤 많은 흥미로운 역사를 품고 있다. 먼저 현대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옛날 조선의 선비들은 이미 이 과일을 알고 있었다. 문헌에 여러 차례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숙종 때 사신을 수행해 북경을 다녀온 김창업이 『연행일기』에 회회국(回回國)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하는 참외 종류로 맛은 참외와 달리 기이한데 지나치게 상쾌해 많이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얼마나 달콤하면서 시원하고 상큼한지를 연행일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겠는데 사실 하미과는 청나라 황제도 처음 먹어보고는 그 맛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지나치게 상쾌하고 놀랄만큼 맛있는 하미과였기에 이 과일에는 지금은 중국의 지배 아래 놓인 위구르 민족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일단 하미과가 나온다는 도시 하미(哈密)는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독립된 위구르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후 청나라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조공을 바치게 되는데 당시 청에 보냈던 공물이 바로 하미과였다. 청나라 문헌인 『신강회부지(新疆回部志)』에는 강희제 때부터 하미국에서 참외(멜론)을 조공으로 보냈다고 나온다.     참고로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하미시에서 북경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200Km이니 서울과 부산까지의 5배 정도 거리다. 이 먼 거리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쉽게 무르고 상하는 멜론 종류 과일을 날랐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연행기록에도 회회국에서는 이 과일이 썩고 무르지 않도록 주로 겨울에 실어 날랐다고 나온다. 중국에 억압받고 정복당한 위구르 민족의 불행이 이때 이미 시작됐다.   또 하나, 하미과와 관련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현대 중국어에서도 그 아픔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사과(傻瓜, shagua)는 어수룩하다, 멍청하다는 뜻의 중국어 단어다. 어리석을 사(傻)와 오이, 참외 과(瓜)자를 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어리석은 오이, 혹은 멍청한 참외라는 말이 되겠는데 여기서 과(瓜)는 여러 정황상 오이나 참외보다는 멜론에 가깝다. 그러니 사과는 어수룩한 멜론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왜 실속 못 차리고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을 바보 같은 멜론이라고 부른 것일까?   다양한 어원설이 있지만 중국 소수민족에서 비롯됐다는 민간 어원설도 있다. 중국 고전인 『좌전(佐傳)』에 "옛날 강융(羌戎)족의 조상이 진나라에 쫓겨 과주(瓜州)에 자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강융은 고대 중국에서 중원 밖 서북지역에 살았던 소수민족이고 과주는 지금의 감숙성 일대다. 물론 고대 지명을 지금과 직접 대비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감숙성과 신강 위구르 자치구와 연결되는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다. 어쨌든 멜론의 고장이라는 뜻의 과주는 고대에도 관련된 농사를 많이 지었기에 생긴 지명일 것이다. 과주에 정착한 강융족을 멜론 농사짓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과자족(瓜子族) 혹은 과인(瓜人)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사람들, 성실함을 넘어 우둔하다 싶을 정도로 고지식해서 아무리 노동착취를 당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그래서 어리석고 멍청한(傻) 과자 사람들(瓜子族)이라고 놀렸는데 이 말이 줄어 어리숙한 멍청이라는 뜻의 사과가 됐다는 것이다.   근거를 찾기 힘든 민간 어원설이지만 중국의 뿌리 깊은 서부 소수민족에 대한 적대감과 조롱, 먼 길을 고생하며 조공으로 하미과를 보냈던 위구르 민족에 대한 핍박이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2023.07.21 06:00

  •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가능할 것인가? (上)

    [최계영의 중국 프리즘]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가능할 것인가? (上)

    사진 셔터스톡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의 최전선은 역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재편을 둘러싼 미국의 각종 제재와 반도체 강국 간의 이합집산이다. 우리는 두 나라가 취하는 각종 조치가 우리 기업의 현지생산이나 대중 수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 움직임에 우리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논의가 활발하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중국 시장에서의 단기적인 유불리를 넘어서는, 보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지정학적 함의를 품고 있다.   미국‧서방에 필적하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 발전 여부는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투사할 수 있는 중국의 힘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전망과 우리의 대응 방향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 과정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설계-제조-패키징이라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중국 반도체 산업은 초기의 패키징 분야 진입에서 더 나아가 설계 단계에서도 일정 수준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AP칩이나 5G 통신 칩셋에서 적지 않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CPU 설계 업체 하이실리콘을 필두로, 지금까지 중국에는 2000개를 넘는 다수의 팹리스 스타트업이 등장하였다. 제조 단계에서도 SMIC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 양쯔메모리(YMTC)와 같은 메모리 반도체 기업도 급성장하였다. 특히 국유기업인 양쯔메모리는 3D 적층구조 구현 능력을 지속해서 발전시켜 2021년에는 128단 낸드 플래시 메모리 생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세가 지속한다면 중국 반도체 기업이 우리에게 위협이 됨은 물론이다. 중국은 2000년대 이후 연평균 10여 개의 반도체 생산기지를 건설해 주요 해안 및 북동부, 서부 내륙에 각 분야 업체들이 서로 의존관계를 갖는 거대한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중국은 특히 10나노~100나노 사이의 성숙한 생산 공정 및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며 스마트폰, 태블릿 PC, 노트북, 통신용 셋톱박스 등 중국 제조업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다양한 산업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과 개방적인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의 참여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의 참여는 필요한 기술‧인력‧장비의 원활한 유입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예를 들면 중국 설계업체들은 미국의 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인 EDA에 의존하며 하이실리콘이 디자인한 반도체는 TSMC에 의존해야 생산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나 미국, 일본의 기술 인력, 특히 대만의 기술인력들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하지만 아직 중국의 기술 수준이 첨단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공급망의 주요 단계마다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단계에서 미국의 제재들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엄청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   미국은 초기부터 반도체 산업의 선두주자였다. 반도체 산업이 점차 세분화, 특화되면서 여러 국가, 기업이 참여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형성되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설계에서 소재, 장비 등 반도체 산업 가치사슬의 사실상 전분야에 걸쳐 원천기술을 장악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덜란드 ASML도 1000여 개에 달하는 EUV 노광장비 부품의 약 3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의 공급망 전반에 대한 기술 장악력은 미국의 각종 제재에 무소불위의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즉, 미국은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을 무기화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대만도 사실상 원천기술을 장악한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될 수 있어 운신의 폭이 좁다.   미국이 반도체산업 대중(對中) 제재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는 무엇일까? 반도체는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경제 및 군사‧안보에 걸친 이중용도 분야이고 생산성 향상을 통한 장기 성장률 제고에 중요하기 때문에 반도체에서 상대방을 제재‧ 봉쇄하는 일련의 정책들은 상대방의 경제성장 모델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즉,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의 승부처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의 전략적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국이 미국 기술을 사용한 제3국 제품의 특정국 반입을 금지하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외국인 투자를 심사‧제한하는 위험심사현대화법(FIRRMA)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 직접적인 대중 제재에 우방국들의 유사한 제재를 병행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일본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우방국들이 대중 제재에 동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뿐만 아니라 중국의 반도체 굴기로 자국 반도체 산업에 중국이라는 경쟁자가 대두함은 물론이고 군사‧안보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의 의존도를 높이는 리스크를 초래한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네덜란드조차 국가정보원(national intelligence agency)의 2023 연례보고서에서 자국 경제안보에 중국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적시하였다.   하지만 대중 제재에 우방국들이 호응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미국이 주도하는 미래 반도체 분야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특정 산업에 대한 원천 기술표준을 선점하고 해당 산업 가치사슬의 요소마다 필수불가결한 IP를 장악함으로써 산업 지배력을 추구해왔다.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다다른 현시점에서 반도체 산업은 소재 및 공정 기술 혁신을 동반한 초미세 공정 EUV 장비의 한계 돌파, 뉴로모픽 컴퓨팅, 양자 ICT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미국조차도 미래 반도체 산업의 전 가치사슬, 생태계를 독자적으로 건설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략적 동반자를 필요로하다. 미래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먼저 자리 잡는 국가는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반면, 반도체 산업 지평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는 국가는 도태되거나 별개의 기술 생태계로 진화해 갈라파고스화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이 미래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국을 고립시킬 동기는 충분하다.   지금까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관련해 가장 강력한 조치는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및 반도체 장비 관련 수출통제(2022. 10. 7)로, 특정 기업이나 장비에 대한 규제를 넘어 산업 전반에 걸친 포괄적 제재이다. 이에 따라 인공지능, 슈퍼컴퓨터에 활용되는 고성능 반도체 수출은 물론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비메모리 생산을 위한 첨단 제조 장비 판매를 YMTC 등 중국 기업에 사실상 금지하였다.   즉 미국은 중국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적 문턱 또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 것으로, 이제 중국의 빅테크들은 첨단 스마트폰이나 자율주행 인공지능 학습모델과 같은 전략 분야 반도체 수급에서 기약할 수 없는 먼 미래까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최근 디커플링이라는 용어가 디리스킹(위험 경감)이라는 완화된 용어로 대체되고는 있지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대한 미국의 전략이 수정될 가능성은 없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양안 관계가 전쟁으로 귀결된다면 미국이 사실상 반도체의 모든 가치사슬에 대한 전면 봉쇄도 불사할지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우방국들도 중국 반도체 시장을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압력(세컨더리 보이콧)에 직면할 수 있다.  ━  중국이 당면한 엄중한 현실   중국도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대비해 왔음은 물론이다. 이미 2020년 9월에 중국과학원은 차보즈(卡脖子)라 불리는, 중국의 ‘목을 조르는’ 35개의 핵심 기술을 발표하였는데 이 가운데 7개가 반도체 가치사슬에 속한다. 그동안 중국은 반도체 자립‧자강을 위해 막대한 보조금과 지방정부의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자국 산업 육성에 매진해왔다.   하지만 필자가 지난 칼럼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반도체와 같이 복잡한 산업에서 진정한 자강은 역설적이게도 고립 상황에서는 이루기 어렵다. 발전에 필요한 기술, 인력, 노하우를 얻기에 개방적 생태계에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설계에서 장비, 첨단 제조에서 모두 해외에 의존하는 단계에서 고립된 국가가 자강하려면 사실상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이 7나노 미세공정에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경제성을 갖춘 양산 체제가 가능할까? ARM의 아키텍처 없이 독자적인 표준을 구현해 경쟁력 있는 모바일 칩을 제공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인가? 몇 가지 질문만 상상해 보아도 독자적 생태계 구축이 얼마나 어려우며, 그 과정에서 상대방도 혁신할 것이기에 독자적 생태계의 경쟁력도 높지 않을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자 빅테크들이 요구하는 첨단 반도체는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었다 해도 팔기가 어려운 것이 중국이 처한 현실이다.   현재 중국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10나노 이하의 미세 패터닝 공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EUV 노광 장비 등 공정장비와 설계자산에서 서방과의 격차를 좁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10나노 이상의 성숙한 반도체 시장에서는 여전히 존재감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최첨단 미세공정 반도체 자립과 풍부한 설계자산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의 대오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더욱 중대한 문제는 미국 주도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생태계에서 제외될 가능성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예상되는 중국의 대응 전략과 미래 시나리오, 그리고 우리의 전략 방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최계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더차이나칼럼    

    2023.07.20 06:00

  •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 臺 위종지 박사의 ‘대만 위기설’ [이성현의 미국서 보는 중국]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 臺 위종지 박사의 ‘대만 위기설’ [이성현의 미국서 보는 중국]

    최근 미국에서 진행된 대만 관련 세미나에서는 ‘데이비슨 윈도우 (the Davidson Window)’라는 개념이 종종 언급된다. 이는 필립 데이비슨(Philip Davidson) 전 미국 인도태평양사령관이 2년 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앞으로 2027년까지 대만 해협에서의 잠재적인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밝힌 내용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를 다룬 책이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대만 현지의 시각은 아직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형편이다. 이에, 대만 국방부 정치작전국 선전심리전처장(國防部 文宣心戰處處長)인 위종지(餘宗基)박사에게 현재 대만이 보는 양안 정세와 역내 지정학에 관해 질문했다. 예비역 장군(소장)인 위종지 박사는 대만 국방대학교 정치작전학원 원장(國防大學 政戰學院院長)이기도 하다. 대만 위종지 박사. 사진 차이나타임즈 캡처 ‘데이비슨 윈도우’는 2027년까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는데, 올해 초에는 이 시기가 더 앞당겨졌다. 4성 현역 장군인 마이클 미니헌 (Michael Minihan) 공중기동사령관이 중국이 2025년에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등 서방은 대만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는 모습이다. 대만 사람들 역시 전쟁을 걱정하고 있지만, 외국에서 우려하는 정도로 전쟁이 ‘임박’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많은 대만 기업들이 중국 본토에 진출해 있고, 이들은 중국 내부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런 현지 정보를 포함하여, 대만이 파악하고 있는 중국 동향은 아마도 다른 국가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할 것이다.    대만군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위협을 평가하는 기준은 중국의 군사력을 뜻하는 ‘능력’과 이를 행동으로 옮길 ‘의지’다. 즉, 시진핑이 실제로 대만을 공격할 의지가 있는지가 관건이다. 시진핑은 군대의 현대화에 많은 투자를 했고, 대만 통일에 대한 그의 언어는 매우 강력하다. 그는 중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그의 개인적인 역사적 레거시(유산)로 보고 있다.   서방에서는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이란 우려도 있다. 푸틴의 경우, 주변 참모나 정보담당자들이 그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 참모들에게도 판단 착오를 일으키게 하였다. 미국과 대만이 걱정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시진핑은 일반적이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결정 과정은 완전히 블랙박스이며, 공산당 내부에서 어떤 도전이나 반대세력도 부재한 상황이다. 이는 중국의 행동에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그렇다면 대만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안전한 대비책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고려하고 그에 대한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관건은 ‘오늘은 푸틴, 내일은 시진핑’이 현실화되지 않게 방지하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능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인민해방군은 기만전술에 뛰어나다. 그들이 공개한 여러 군사 훈련 장면을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장비가 매우 현대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싸우면 이길 것(能打勝仗)’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를 수 있다. 러시아군이 그 예다. 러시아군은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전투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그들은 저조한 능력을 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편, 대만군은 우크라이나보다 더 강력한 보복 수단을 가지고 있다.     인민해방군에 다른 약점도 있나? 중국의 ‘한 자녀 정책’ 영향으로 인민해방군 군인 대부분이 집안의 독자다. 이들이 언제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중국 정부가 선전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면, 그 집안은 대가 끊기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 큰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예를 들어 2020년 중국-인도 국경 유혈 분쟁이 있었을 때, 인도군은 자신들의 사망자를 즉시 공개했지만, 중국은 반년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뒤늦게 공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수차례 군대를 파견해 대만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대만 유사시 실제로 미군이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태도로 미래의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우선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야 다른 사람들도 도와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시사점이다.   더 부연해달라. 현재까지 우크라이나군은 일부 지역에서 러시아군보다 공중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공격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파괴할 수 있다. 미국이 실제로 병력을 파견할지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기대가 있다면 그것에 심리적으로 의존해 우리의 국방 준비에 오히려 소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우방과의 협력을 통해 변화하는 전장 상황에 대비하고, 대만에 필요한 무기 및 장비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최근 미국이 대만과 함께 고려하고 있는 사항이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대만을 도와주고 있나? 예를 들면, 미국은 탄약고와 연료 저장고를 싱가포르 등 역내 다른 국가에서 대만으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중국군의 대만 봉쇄나 미국이 직접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한다. 대만은 이러한 자원을 이용해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대만과 한국은 1992년 단교를 했지만, 최근 한국에서 대만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향후 대만과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산업 구조 측면에서 대만과 한국은 경쟁 요소가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양국의 군대가 상호 교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에는 많은 군인 친구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모두 민주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첫째, 서로 보완적인 군사 기술 분야이다. 예를 들어, 대만이 개발한 전투기 경국호(經國號·IDF)의 설계기술을 맡았던 엔지니어들이 후에 한국의 T-50 고등훈련기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현대전에서 주목받고 있는 무인기 분야에서도 대만은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많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IT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고, 미래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대만과 한국이 이런 분야에서 협력하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둘째, 정보 공유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 일본, 미국이 3국 간의 정보 공유를 재개하였다. 대만 역시 미국과 오랜 정보 공유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최신이며 사정거리가 5000km에 달하는 레이더 ‘페이브 포스(Pave Paws)’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이 리소스를 공유하면 서로 간 ‘윈윈’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   이성현 조지HW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더차이나칼럼

    2023.07.19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 내 친중파 약진은 무얼 말하나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 내 친중파 약진은 무얼 말하나

    【서울=뉴시스】2019.06.22. 북한을 공식 국빈방문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여사가 21일 평양 우의탑을 찾아 꽃바구니를 진정했다고, 노동신문이 22일 보도했다. 출처=노동신문photo@newsis.com 지난 6월 28일 평양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조중우의탑의 내부 개선 공사를 완공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북한 측을 대표해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주창일 노동당 선전선동부장, 임경재 도시경영상 등이 참석했다. 중국 측을 대표해서는 왕야쥔 주북한 중국 대사가 동참했다.   조중우의탑은 1959년 10월 25일 세워졌다. 중국인민지원군이 1958년 완전히 철수한 지 1년 뒤다. 북한은 왜 10월 25일 이 탑을 세웠을까? 그날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이 평안북도 운산군 지역에서 UN군과 처음 교전한 날이다.   또한 10월 25일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철군을 마무리한 날이기도 하다. 양융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1958년 10월 25일 철군하면서 “8년 전의 오늘은 바로 우리 군이 항미원조전쟁의 서막을 여는 전쟁 전야였지만, 오늘 우리는 조국(중국) 인민이 우리에게 부탁한 사명을 완수하고 조국에 돌아간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조중우의탑을 건립했다. 평양시 모란봉 기슭에 있는 조중우의탑은 1958년 2월 방북한 저우언라이와 김일성이 함께 답사하면서 장소를 선정했다. 이 탑은 10월 25일을 상징해 1025개의 화강석과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하면 이곳을 찾아 헌화한다.   이번 기념식에서 임경재 북한 도시경영상은 “이 탑은 김일성 주석이 제안해 세웠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4년 10월 개‧증축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안해 내부를 새롭게 단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등 역대 수령들이 북‧중 우의를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중시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번에 조중우의탑의 내부 공사는 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과 전후 재건 과정에 참여한 사진‧회화‧글 등 전시자료를 재구성해 완공했다.   북한은 조중우의탑의 내부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국해방전쟁승리(1953년 7월 27일)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일을 조국해방전쟁승리 기념일(전승절)이라고 부른다. 김정은이 현재 북‧중 관계에 관한 관심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 그가 기댈 사람은 싫으나 좋으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밖에 없다. 시진핑과 코드를 맞춰야 어떤 과정이든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왜 기념식을 정전협정 체결일보다 한 달 정도 앞당겼을까? 7월 27일 즈음해 기념식을 진행해도 된다. 굳이 6월 28일 진행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북한은 최근 6월을 북‧중 관계에서 특별한 달이라고 강조했다. 문성혁 북한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은 지난 6월 20일 주북한 중국 대사관을 찾았다. 왕야쥔 주북한 대사에게 왜 6월이 특별한 달인 지를 설명했다. 문성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3년 6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6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리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9년 6월 평양을 찾았다”며 “따라서 6월은 북‧중 관계에서 특별한 달”이라고 강조했다.   문성혁이 근무하는 북한 노동당 국제부는 외무성보다 대중국 외교에서 더 중요한 부서다. ‘정부간 외교’보다 ‘정당간 외교’를 중시하는 북‧중 관계에서 노동당 국제부가 중국과 더 깊숙한 얘기를 나눈다. 노동당 국제부의 파트너는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다. 왕야쥔 대사가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역임하고 평양에 왔다. 따라서 문성혁-왕야쥔은 다른 누구와의 만남보다 깊고 실질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다.   문성혁이 6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과 북‧중 우호의 증인이자 상징인 조중우의탑의 기념식을 6월 28일에 맞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둘째,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일에 맞춰 대규모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70주년이라 대대적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중우의탑의 기념행사를 같은 시기에 하는 것보다 분리해 서둘러 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김정은은 대내 결속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중되는 경제난에 대한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정찰위성의 실패마저 고백했다. 김정은에게는 반전이 절박하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대규모 열병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조중우의탑의 기념행사는 서둘러 진행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셋째, 북한 내부 친중파의 약진이다. 북한의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하면 친중파에 좋은 기회다.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는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조용원 당 조직비서‧김성남 당 국제부장‧주창일 당 선전선동부장‧임경재 도시경영상‧김민섭 국방성 부상 등이다. 이들은 현재 북한 내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게 북‧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현재 북한은 외교적으로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과 관련된 일이 최우선이다. 바그너그룹 프리고진의 지난 6월 23일 ‘1일 천하’가 끝나면서 북한은 더 중국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게 됐다. 러시아가 북한을 생각할 여력이 더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북한 내부에서 친중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조중우의탑의 기념행사가 서둘렀다고 볼 수 있다.   북‧중 관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김정은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국내외적 상황이 그렇게 몰고 가고 있다. 북한은 바이든 행정부에 일말의 기대마저 접은 것 같다. 오직 내년 미국 대선만 쳐다보고 있다.   내년에 당선될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바람을 들어줄지 미지수다. 조중우의탑의 기념행사를 서두르는 북한을 보면서 과거의 외교 패턴을 반복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하게 방향 전환을 하면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텐데. 김정은이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 미국과 손잡기를 기대해 본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2023.07.18 06:00